어느푸른저녁

고양이의 여름

시월의숲 2009. 6. 11. 21:50

어제까지만 해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서 견딜만 했는데, 오늘은 완전히 여름이다. 내가 일하는 곳은 아침부터 외벽공사를 시작했고, 그래서 당연히 시끄러웠고, 외부사람들이 많이 들락거려서 정신이 없었다. 하는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머리는 무거웠으며 몸은 둔했다. 또 얼마나 어수선한지. 이 모든 것의 본질적인 원인은 바로 더위다. 좀 과장을 하자면, 뫼르소가 그랬던 것처럼 살인을 불러일으킬수도 있는 더위. 내리쬐는 태양! 아, 이 여름을 또 어떻게 나야할지.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여니 새끼 고양이 서너마리가 화들짝 도망간다. 고양이는 내 방 맞은편에 있는 창고의 굳게 닫힌 나무문 밑으로 믿을 수 없는 유연성을 발휘해서 쏙 들어가 버린다. 아직 몸집이 작은 새끼라서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놀라웠다. 순식간에 몸을 가로로 쫙 펼쳐서 좁은 틈새로 들어가버리다니! 반면 어미로 보이는 어른 고양이는 문 옆에서 경계에 찬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놀란 것에 대한 분풀이로 괜히 가만히 있는 어미 고양이를 쫓아내려는 시늉을 했다. 고양이는 자기 새끼들을 해칠까봐 마음껏 도망가 버리지도 못하고 이 사이로 낮게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새끼들을 해치려고 했어도 그 어미 고양이는 어쩌지 못했으리라. 그게 약육강식의 세계니까.

 

약육강식, 하니까 엉뚱하게도 내가 다른 생명에게는 강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평소에 나는 항상 약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긴 생각해보면 주위의 모든 작은 곤충들과 풀들이 모두 내겐 약자였다. 하지만 그것들이 진실로 약자인가? 고양이와 나는 무엇이 다른가? 내가 그보다 강하다는 혹은 약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나는 고작 이 정도의 더위에도 온갖 짜증과 엄살을 부리고 있는데!

 

고양이도 분명 더위를 느낄 것이다. 인간과는 종이 다르니 같은 더위라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다르겠지만. 고양이도 고양이 나름대로 여름을 날 것이다. 나도 내 나름대로 여름을 날 준비를 해야겠다. 더위에 먹히지 않도록. 창고에 기거하는 새끼고양이들은 언제쯤 어른고양이가 되어서 창고를 떠나게 될까? 어둠을 좋아하는 그들, 인간과 함께 살아가지만 야성을 버리지 않는 그들,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눈을 가진 그들, 문득 고양이들의 여름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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