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게릴라

시월의숲 2009. 6. 2. 20:58

1.

게릴라성 폭우가 시작되었단다.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처럼,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린다. 하늘도 견디다 못해 조울증에 걸린 것인가? 갑자기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가, 어느 순간 잠잠하고, 다시 쏟아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야생의 동물처럼 낮게 그르렁거리는 하늘과 그에 장단 맞추듯 번쩍이는 번개가 알 수 없는 불안을 조장한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고.

 

 

2.

가족으로부터 전화가 오면 우선 깊은 한숨을 쉰 다음 핸드폰을 받는다. 핸드폰 액정화면에 내 가족들의 번호가 뜬 것을 본 순간 알 수 없는 압박감과 부담감이 나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난 가족들에게 빚진게 없는데, 왜 이렇게 힘겨워하는 것인지 어떨 땐 나조차 의아하다. 내 마음 깊은 곳에는 가족들의 관심과 위로를 거부하고픈 생래적인 저항감이 있는 것인가.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나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이 다 흡혈귀가 아닐까 하는 망상. 모두들 내 피를 빨아먹지 못해 안달을 하는 것이다. 이건 분명 지나친 피해의식이다. 나는 오히려 그들의 세계에서 안주하고 순응하며 살아왔으니까. 하지만 그들을 만날 때면 드는 이 힘겨움과 한숨은 쉬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인가?

 

 

3.

플래닛에 노래를 바꾸려고 음악 폴더를 봤더니 내가 구입하지 않은 노래가 들어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삽입곡, 사랑의 테마라니! 내가 가진 노래 중의 하나가 바뀐 것일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무슨 오류라도 난 것일까? 암튼 오늘같이 축 쳐지는 날 더욱 쳐지는 노래임에는 분명하다. 그래도 어찌하다 내 폴더에 들어온 것이니 며칠은 틀어놓을 생각이다. 아, 내일이 되면 또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지만. 프랑스 항공기가 대서양 하늘에서 갑작스레 실종된 것처럼.

 

 

4.

게릴라, 라는 말이 입에 맴돈다. 비도, 가족들의 전화도, 프랑스 항공기도 모두 게릴라처럼 떠들썩했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하지만 떠들썩했을 때의 느낌은 오래도록 남아 마음을 짓누르는 무엇이 될 것이다. 아, 이상스레 슬픔을 품고 있는, 폭도같은 어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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