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제주기행

시월의숲 2009. 7. 30. 21:04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후로 처음 가 본 제주도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제주공항에 처음 내렸을 때 얼굴에 부딛히던 특유의 바람과 도로 옆의 즐비한 돌담은 역시 그대로였으나, 그 어느 것에도 처음만큼의 설렘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제주도에 올 것을 결정지었던 한 달 전부터 그랬다. 이건 생각지 못한 일이다. 같이 간 이의 말로는 사람이 나이가 들면 그렇게 된다지만, 주위의 나이든 사람들을 관찰했 봤을 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여행이라면 반사적으로 느껴지던 설렘, 그 기대감이 어쩐지 이번 제주여행에서는 유독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왜 일까? 제주도에 가기 전에도, 그곳에 도착해서도,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그 이유에 대해서 골몰히 생각했지만, 생각하면 할 수록 머리만 더 아파온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설렘이 거세된 여행이라서 그랬던 것일까? 가기 전날 장염에 걸려 하루 종일 누워 있다가 급기야 병원에 다녀와야 했다. 태어나서 그렇게 화장실을 많이 간 날은 아마도 그날이 처음일 것이다. 온 몸이 커다란 망치로 두들겨 맞은듯 아프고, 열은 오르고, 속은 매스껍고, 배는 아프고... 식구들에게 제주도는 나 빼고 다녀오라고 진심으로 말했지만, 식구들은 내가 가지 않으면 자신들도 가지 않겠다는, 속보이는 거짓말을 했다. 그건 내가 아프더라도 반드시 가야한다는 말과 같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좀 더 내 몸의 상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다행이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은 것이 효과가 있었던지, 열이 내렸고 몸살기도 사라져서 제법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아직 배아픔은 남아있었지만 모처럼 가는 제주도이고, 이번에 가지 않으면 언제 또 갈 수 있을지 모르는, 기약없는 곳이기에 스스로 몸을 추스려 가까스로 제주도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동생의 남자친구가 가이드 노릇을 했는데,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제주도를 여섯 번 정도 와봤다는 그는, 우리의 이박 삼일간의 일정이 무척이나 짧은 듯 제주도 이곳 저곳을 속속들이 구경시켜 주려 노력했다. 하지만 나는 정상적인 컨디션도 아닌데다 날은 덥고 피곤하여 그만 펜션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그의 노력이 가상하여 그가 끌고 가는데로 이리저리 구경을 다녔다(지금 생각하면 그에게 많이 미안하다). 테디베어 박물관, 돌고래 쇼, 천지연, 유리의 성, 생각하는 정원, 카멜리아힐, 자동차박물관, 주상절리, 정방폭포, 제주녹차밭, 협제 해수욕장... 이틀 동안 가 본 곳인데, 아마 빠트린 곳도 있을 것이다. 지금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유리의 성과 주상절리 그리고 정방폭포 정도이다. 아, 나는 제주도를 다녀오기나 한 것인가?

 

볼 것이 너무나도 많은 제주도는 그 많은 것들을 다 보려고 한다면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본 것이 없는 것이다. 또 제주도를 제대로 느껴려면 수많은 인공 박물관들 보다 제주도의 자연 경관을 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지금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곳이 주상절리나 정방폭포 이듯이. 그곳에서만이 잠시나마 내 장염과 여독을 느끼지 않게 해 주었으니 말이다. 만약 다음에 또다시 제주도에 가게 된다면 성산일출봉과 우도를 꼭 가보리라. 가보고 싶었던(펜션에서 무척 가까웠다!) 이중섭 박물관은 마침 월요일날 간 관계로 문이 닫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일년 남짓 지냈다는 집 앞에 잠시 앉아 있다 나온걸로 만족해야만 했다. 여러모로 이번 제주 여행은 많은 아쉬움만 남긴채 끝이 났다. 불확실한 기약만 마음 속에 남겨 둔채. 어째 좀 슬픈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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