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우연한 여행

시월의숲 2009. 8. 31. 16:58

1.

안동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이었지만, 전혀 오랜만임을 느낄 수 없는 관계, 그런 친구들. 그 중 한 친구는 내게 예전보다 늙어보인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자연스레 생기를 잃어가는, 어찌할 수 없는 자연현상에 나도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에 새삼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건 불가항력적인 것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으므로 이내 담담해졌다. 아직은 세월의 흐름 따위를 세어가며 안타까워 할 나이는 아닌 것이다. 그저 열심히 읽고, 쓰고, 달리는 것만 생각해야 하는, 그런 나이인데.

 

 

2.

새로 안경을 맞추었다. 지금 쓰고 있는 안경을 언제 했더라? 2년 전? 3년 전? 오래 쓴 탓인지, 아니면 안경을 험하게 쓴 탓인지, 렌즈 표면에 미세한 흠집이 많이도 나 있다. 지금까지는 아무런 의식없이 써오다가 며칠 전부터 그 흠집이 신경 쓰이기 시작하더니, 머릿속에 온통 안경의 흠집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차버렸다. 그래서 마음먹고 안경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안경점 아저씨는 내 안경을 이리저리 훑어 보더니 다짜고짜 저쪽에 가서 앉으라고 했다. 엉겹결에 자리에 앉자 하얗고 커다란 기계를 내 얼굴 앞에 들이밀더니 거기다 얼굴을 갖다 대고 눈을 크게 뜨라고 했다. 아저씨가 시키는 일련의 과정을 다 마치고 나서야 테를 고를 수 있었다. 렌즈와 테의 가격이 생각보다 비쌌지만, 내 눈을 위해 이 정도는 투자하자는 마음으로 3개월 할부로 결제를 했다. 하고 나서는 가격 때문에 속이 좀 쓰렸지만, 새 안경을 쓰고 본 세상이 너무나도 선명하고 밝아서 돈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안경을 쓰지 않고는 사람 한 명 알아보지 못하고, 낮은 턱에도 걸려 넘어지는 나를 생각하니, 새삼 안경이 고마웠다. 눈 나쁜 것도 장애이리라. 너무나 일반적이라 장애라는 말이 오히려 무색할 지경인. 새삼 '장애'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3.

삶은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 삶이란 어쩌면 우리가 그렇게 선택했기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그저 점심이나 한 끼하고 헤어지려고 했는데, 어찌어찌하다 보니 렌트카를 빌리게 되었고, 그래서 그날 바로 울진으로 오게 되었다. 안동에서 울진이라니! 울진에서 우리들은 밤바다를 보았고, 유난히 거센 파도와 칠흙같은 어둠을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밤의 바다는 생과 사의 원초적인 느낌을 우리의 가슴 속에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다음 날에는 성류굴에 들렀는데, 그곳은 수천년의 시간이 쌓여 생성된 곳이었다. 그곳의 석순들은 보이지 않는 시간에 형태를 부여한 듯한 미묘한 모습으로 거기 존재했다. 차갑고 습기찬 돌들이 손끝에 닿을 때마다 그 돌에 스며든 수천, 수만의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시간이 나를 통과하여 지나가는 듯한 착각에 가슴이 서늘해지곤 했다. 온 몸으로 압박해 들어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묘한 아름다움! 이러한 모든 여행의 체험이 전혀 생각하지 않았지만, 계획되어진 것이라면 믿을 수 있을까.

 

 

4.

우리의 삶을 조금씩 변화시키는 것은 이렇듯 우연찮게 생겨나는 삶의 변수, 즉흥성일 것이다. 이런 삶의 긍정적인 즉흥성은 우리의 삶을 좀 더 풍요롭고 여유롭게 해준다.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우연한 여행과도 같은, 이러한 삶의 즉흥성도 결국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와 계획이 조금이라도 반영되는 것이라면, 어쩌면 계획대로 되지 않는 삶이란 없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우연이라는 것이 실은 그 속에 필연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삶이란, 실은 우리가 그것과는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은 수많은 변수들에 의한 수많은 계획의 변경과 수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 어쩌면 삶을 이루는 대부분의 것들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험한 동거  (0) 2009.09.07
단 한 권의 책  (0) 2009.09.03
집으로...  (0) 2009.08.29
죽음에 이르는 병  (0) 2009.08.26
비극적인 낭만, 낭만적인 비극  (0) 2009.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