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단 한 권의 책

시월의숲 2009. 9. 3. 21:28

그는 도서관에 근무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매일, 무수히도 많은 간행물들이 도서관으로 쏟아지듯 들어오고, 또 그만큼 버려진다는 사실을. 전국 각지에서 보내져 온 서적들은 기존에 비치해 오던 서적들을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이 소각되거나 고물상에 넘겨졌다. 사실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다. 버려지는 책들의 대부분은 일반인들이 즐겨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책들이었던 것이다. 전국 각지의 지방자치단체에서 보내오는 통계자료들, 각종 홍보물들, 동아시아 정세에 관한 책들, 이름도 생소한 작가의 전집, 지방 어느 문중에서 보내온 족보, 원자력백서 등... 전문적이거나 지역적으로 편중된 지식들을 나열해 놓은 책들을 볼 사람이 과연 있을 것인가?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 또한 들었다. 그 많은 책들이 단 한 사람의 독자도 가지지 못한 채, 태어나자마자 포대에 싸여 버려진 아이처럼, 그렇게 버려진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무척이나 슬픈 일로 다가왔다. 그 자신조차 그렇게 버려지는 책들을 읽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기에 더욱. 하지만 슬퍼한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겠는가? 여전히 사람들은 그들만의 정책과 사건과 문학 등을 책으로 만들어낼 것이며, 그것들을 전국의 각 도서관 혹은 기관에 보낼 것이다. 우연히 선택된 책들은 살아남을 것이며 그렇지 못한 책들은 과감히 버려질 것이다. 무척이나 단순명쾌한 그 사실이 너무나 무섭고 끔찍하여 그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았다. 책을 만들기 위해 쓰러졌던 수많은 나무들과, 글을 써내기 위해 기울였던 필자의 노력과, 인쇄 기술자의 노력은 다 무엇이었나? 그는 버려지는 책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 누구의 눈길도 받아보지 못하고, 그 누구에게도 읽히지 못하며, 그리하여 단 한 명도 그를 알았노라고 말하지 못하는 운명을 타고난 자. 태어나자마자 버려져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자의 비극성이, 그와 버려지는 책 사이에 같은 농도로 존재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얼마지나지 않아 까맣게 타버릴 책들 속에서 단 한 권의 책을 집어 들었다. 슬퍼하지 않으리라. 내가 집어 든 이 한 권의 책처럼, 나또한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어 읽혀지는 날이 반드시 있으리라. 결코 헛된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려 멈출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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