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위험한 동거

시월의숲 2009. 9. 7. 16:48

아침에 햇빛이 쨍쨍하여 오늘도 덥겠구나 했는데, 지금은 잔뜩 흐려저 비라도 올 기세다. 오전에 빨래를 널어놓았는데, 지금 날씨로 봐서는 비가 올지도 모르니 좀 신경을 써야겠다. 빨래를 널고 나서 방으로 들어오다가 문득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거대한 말벌의 시체를 보았다. 내 손가락 한 마디보다 큰 말벌은 허리가 정반대로 꺾여져 있었는데, 혹시나 해서 후, 하고 바람을 불어보았지만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다 말벌은 허리가 꺾인채 이곳에 죽어 있는 것일까, 궁금해하면서 무심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는데, 거기, 지붕의 차양과 빗물을 받는 홈통 사이에 거대한(거대하다고 밖에 표현하지 못할!) 말벌집이 있는 것이 아닌가! 저렇게 큰 말벌집이라면 꽤 오랫동안 그곳에 존재했던 것이 분명한데, 이제서야 그것의 존재를 알게 되다니, 놀라워서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껏 계속 그 밑을 지나다녔는데 말이다. 사실 일부러 쳐다보지 않으면 잘 눈치채지 못할 곳에 있긴 했지만, 태양을 가려버릴(!) 정도의 크기인데! 참, 내가 이렇게 주의력이 없는 사람이었다니... 이제 말벌집의 존재를 알았으니 어찌해야 할 것인가? 날이 추워지면 말벌들은 자연히 사라지겠지만, 그때까지 벌집을 가만히 두어야 하는지, 아니면 혹시나 모를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벌집을 없애야 하는지, 없애려다 오히려 더 큰 화를 입는 것은 아닌지, 여러 생각들이 두서없이 떠올라 머릿속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큰 위협을 느끼지 않는 한 그냥 나두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좀 위험한 동거이긴 하지만 말벌하고 같이 산다고 생각하면 자취생활이 좀 덜 외롭지 않겠는가. 어쨌든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비둘기>에 나오는 비둘기처럼,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릴 정도의 사건은 아닌 것이다. 아니, 아니지. 방문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비둘기보다 머리 위에 거대하게 달려있는 벌집의 말벌들이 더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아악, 이를 어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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