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사라진 시간들

시월의숲 2009. 9. 21. 20:07

늘 느끼는 것이지만, 시간은 정말 금방 사라진다. 흐르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다. 어디로, 어떻게 사라지는지 알 수 없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사라진 시간의 환영 혹은 기억들 뿐이다. 그것은 현실에서 분명히 일어났지만 점차 꿈처럼 희미해지고 결국 그것이 실재했는지, 내가 그것을 직접 겪었는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눈에 보이지 않을만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부식시킨다. 가족들을 만나고, 그들과 인사를 하고, 밥을 먹고, 벌초를 하고, 아직은 뜨거운 태양을 견디지 못하고, 밤이 되면 찬기운에 옷을 껴입고,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웃으며, 의미없는 눈길을 주고 받는 것. 나는 그들과 진정 만났 적이 있는가? 나는 진정 저 태양과, 바람의 선선함과, 벌써 누렇게 되어버린 벼의 들판을 보거나 느낀 적이 있는가? 설사 진정으로 내가 그 모든 것을 겪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게 어떤 흔적을 남겼던가. 그리고 그 흔적의 의미는 무엇인가. 내게 남은 단편적인 기억들은 이미 내 것이 아닌 것만 같다. 그것은 혹 꿈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환영? 늘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만 같아 안타깝지만, 일상에서 웬만해서는 별 인상을 받지 못하는 자의 건조한 삶은 얼마나 불행한 것일까. 그렇게 사라져버리는 시간을 그저 사라지게 놓아둔 자의 불행은. 하지만 시간을 병 속에 가둬놓을 수는 없다. 그것은 언제나 연기처럼 희미한 기억만 남긴채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늘 조금씩 불행할 수 밖에 없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도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며,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배반하며, 증오하는 것이리라. 아, 사라지는 시간들, 사라지는 나날들. 슬픔조차 머무르지 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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