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희극적인 비극

시월의숲 2009. 9. 10. 20:49

1. 결혼사진

 

선선한 기운에 눈을 뜬다. 머리를 감는데 수돗물이 제법 차게 느껴진다. 여느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출근 준비하는데 허둥거린다. 출근하는 길, 쓰레기더미 옆에 핀 선명한 보라색 나팔꽃이 내 시선을 잡아끈다. 마치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양, 꽃잎을 한껏 벌리고 있는 자태가 제법 요염하기까지 하다. 어제 보았던, 액자채로 버려진 커다란 결혼사진이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커다란 결혼사진을 길가에 떡하니 전시하듯 버려놓은 대담함과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남녀의 해맑은 얼굴이 너무나 대조적이고 희극적이기까지하여 어제는 조금 충격을 받았었다. 그 사진 속의 커플은 이제 헤어진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액자가 낡았기 때문에 버린 것일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장면은 내 머릿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것은 희극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인생의 한 단면을 절묘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 벌레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있다. 하루아침에 흉측한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의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나도 이와 비슷한 소설을 쓸수 있지 않을까 잠시 생각했다. 이번엔 주인공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가족들이 변하는 것이다. 그레고르처럼, 그의 죽음이 가족들에게 아무런 슬픔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게 하는 부조리를 타파하기 위하여 가족들을 모조리 벌레로 변신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레고르는 홀가분히 가족들을 떠나 새출발을 하게 된다. 정반대의 상황에 처하게 되는 가족들의 심리를 묘사하는데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가족들도 소외된 그레고르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아, 불쌍한 그레고르. 정말로 흉측한 것은 생존경쟁에서 떨어져나간 자를 소외시켜 죽음으로까지 몰고가는 사회란 이름의 거대한 벌레일 것이다. 이 얼마나 희극적인 비극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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