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시간이 멈춘 듯한 곳에서

시월의숲 2009. 9. 22. 21:03

그 학교는 읍내에서 4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원래 이 고장은 인근의 고장에 비해 산세가 험하여 육지의 섬이라는 별칭이 붙어있을 정도로 고립되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고장에서도 무려 40분이나 차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란 도대체 어떤 곳이란 말인가? 올려다보면 온통 푸른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구렁이가 또아리를 튼듯 구불구불한 길은 콘크리트를 깔아놓아 쉴새없이 덜컹거리고, 자칫 운전 실수라도 한다면 끝을 알 수 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져 언제 구조될지 알 수 없는 곳. 도대체 어디에 마을이 있고, 사람이 산다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내가 잘못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때쯤, 거짓말처럼 학교가 나타났다. 정말, 그곳에, 학, 교, 가 있었다니!

 

그곳은 인근 마을에 있는 초등학교의 분교로서 전교생이 총 8명 밖에 되지 않는 무척이나 작은 학교였다. 교문 앞에는 학교 직원인듯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대빗자루를 들고 낙엽을 쓸고 있었다. 무척이나 조용한 곳이어서 낙엽을 쓸어내는 빗자루의 서걱거리는 소리만 귓가에 크게 울렸다. 어느 곳이든지 그 본래의 목적이 상실되어 가는 곳은 특유의 쓸쓸하고 휑한 분위기를 풍기기 마련인데, 이 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때는 수많은 아이들로 북적거렸을 학교가 고작 여덟 명의 아이들을 품고 서서히 시간의 풍화작용에 부식되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좀 슬픈 일이었다. 하지만 그곳의 아이들은 무척이나 싱그러운 과일의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해맑았으며, 티 한 점 없는 얼굴엔 사과씨처럼 검은 눈동자가 깊이 박혀 있었다. 처음 본 낯선 나에게도 서슴없이 인사를 했다. 그 싱그러움과 해맑음! 그것은 분명 푸른 나무들이 내뿜는 맑은 기운이 바람을 타고 그들의 폐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나무들의 푸름을 닮아 있었다.

 

그 곳에서 시간은 가지 않거나 순식간에 흘러간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곳에서의 한 시간이 저 바깥 세상에서의 일 년이 아닐까 하는. 그래서 이곳에서 하루를 지낸다면 바깥 세상에서의 나는 아마도 많이 늙어버린 것이다. 죽지 않으려면 이 곳에서 영원히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묘한 두려움과 신비로움이 그곳에 머무르는 내내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그들에게 있어 속세에서의 기쁨, 배반, 증오, 사랑, 절망, 고독 따위의 감정은 먼지만큼 하찮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 내가 감히 그들의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사라져버리는 시간을 안타까워하며 붙잡지 못해 안달하는 내가. 그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을 닮고 싶다. 그들의 그 푸릇푸릇한 생기를 닮고 싶다. 헌데, 그들은 진정 지금 나와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 인간이 맞기는 한 것일까? 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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