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낮에 만난 여인에게

시월의숲 2009. 9. 15. 19:52

오늘 여호와의 증인의 신자인듯 보이는 여인을 만났다. 그녀는 내게 착하게 생겼다고 말하고는 혹시 성경을 읽어보았냐고 물었다. 나는 지금 고향이 아닌 타지에 와 있어서 주말만 되면 집에 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종교에 전혀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니나 특별히 기독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고도 했다. 점심을 먹고난 후 약간의 시간이 남아 좀 쉬려고 마음 먹었던 내 계획이 그 여인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가버려 내심 짜쯩이 밀려왔다. 귀찮아하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인은 커다란 화일을 내 앞에 척 펼치더니 일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성경이니, 영계니, 죽음이니 하는 말들을 쉼없이 쏟아내는 여인의 입과 얼굴은 그녀가 믿는 신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차 보였다. 하긴, 그렇지 않다면 저렇듯 거침없이, 유수와도 같은 말들을 쏟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여인이 보여준 화일에는 고 최진실의 죽음에 관한 가시도 스크랩되어 있었다. 그렇게 물질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는듯 보이는 연예인이 자살을 한 원인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여인은 대답을 바라지 않는 물음을 내게 던지고는 즉시 그 해답을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결의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영계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는 것. 당신은 영계를 믿는가? 지옥에 대한 꿈을 꾸는가? 그 여인은 아마도 기독교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내가 만난 기독교인들의 대부분은 그들이 다니는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다. 무슨무슨 교회 나오세요. 하지만 여인은 단 한 번도 교회라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다만 어디서 인쇄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인쇄물을 화일에 차곡차곡 담아서 그것을 보여주고, 설명할 뿐이었다. 그리고 성경이라는 말을 수차례 했다.

 

 

*

 

 

성경을 아세요? 성경을 읽어보셨나요? 아뇨, 전 아직 성경을 읽어보지 못했어요. 마음 속으로는 한 번 쯤 읽어보고 싶었지만, 어쩐지 몸이 따라가지 않더군요. 하지만 언젠가는 꼭 읽어볼 생각이에요. 그리고 마음이 내킨다면 성당에도 나가볼 생각이고요. 교회요? 글쎄, 교회는 좀 망설여지는군요. 왜 그런지는 저도 확실히 모르겠어요. 제 선입견인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 본연의 뜻이 원래 나쁜 종교는 없는 거잖아요. 죽음요? 네, 저도 종종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한답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도 목격했고요. 어떤 신에의 믿음이 있다면... 슬픔이나 절망 같은 것을 조금이나마 쉬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당신이 쏟아내는 수없이 많은 그 말들이 왜 제게는 단 한마디도 가슴에 와닿지 않는 것일까요? 왜 제 마음 속에 단 한 방울의 파문도 일지 않는 것일까요? 그래요. 절실함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믿음에 관한 절실한 마음이 아직 제게는 없어요. 하지만 그건 어떻게 해야 생겨나는 것인가요? 만약 신을 믿는다면, 한 인간을 자살로 몰고가는 상황이란 생겨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인가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건 알아요. 당신의 말을 듣는 순간 더이상 그 말이 내 귓가에, 마음에 울려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요. 하지만 당신, 언젠가 다시 한 번 내게 속삭여 주세요. 분명, 그 언젠가는 내가 신을 믿고 싶어했었다는 사실을 당신도 알게 될테니까요. 내 무의식 저 깊은 곳 어딘가에서는 분명 신을 간절히 부르는 내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간이 멈춘 듯한 곳에서   (0) 2009.09.22
사라진 시간들  (0) 2009.09.21
희극적인 비극  (0) 2009.09.10
쿨한 인간  (0) 2009.09.09
위험한 동거  (0) 2009.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