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루클라 공항

시월의숲 2009. 9. 26. 12:49

일상은 반복의 연속이다. 반복은 처음의 설렘과 기대, 긴장, 불안, 낯섦 같은 감정들을 완화시켜주고 종래에는 무마시켜버린다. 그런 완화와 무마를 통해 우리는 편안함을 얻기도 하지만 반대로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편안함을 추구하며 그것에 안주하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러한 일상의 반복에 답답함과 싫증을 느끼게 되고 급기야는 삶의 의미마저 잃어버리게 되는 사태에 빠진다. 매일 지루한 일상이 반복된다는 생각 자체만으로도 끔찍하지 않은가? 그러한 삶의 위기(?)를 탈출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이라는 잠시동안의 탈출을 꿈꿀 것이고, 그것을 실행할 것이다.

 

여행! 이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가! 사람들은 일상의 반복과 그 반복에서 오는 엄청난 삶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내기 위해 혹은 잊기 위해 여행을 한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들은 자신이 찾는 것, 행복, 삶의 의미, 고민의 해결, 아픔의 정화, 망각, 금연이나 금주에의 결심 같은 크고 작은 소망들을 그곳에서 이룰수 있게 되는가? 그들이 찾는 것이 히말라야의 설산 속에, 태평양의 바다 한가운데, 깊은 계곡 속에 존재하는 것이던가? 미시마 유키오는 <가면의 고백>이라는 소설에서, '여행 준비로 정신이 없을 때만큼 우리들이 여행을 구석구석까지 완전히 소유하는 때는 없다'라고 말한다. 즉, 여행이란 한바탕 헛소동인 것이며,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이 곧 여행의 전부인 것이다.

 

소설가 해이수의 단편 <루클라 공항>도 히말라야의 험준한 산을 올라갔다 왔거나 올라가기 위해 루클라 공항으로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공항은 여행의 실질적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누군가는 담배와 알콜중독의 나락으로 떨어질 위험에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 누군가는 찬란한 문명의 이기를 벗어나 좀 더 자연에 가까운 삶을 느껴보기 위해, 누군가는 수차례의 이혼과 이별로 인한 아픔을 떨쳐버리기 위해 공항으로 모인다. 하지만 예상밖의 폭설로 비행기가 휴항되고 사람들은 꼼짝없이 그곳에 갇히게 된다.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가자 금연과 금주를 하기 위해 온 사람은 담배와 술을, 문명의 이기에서 도망쳐 온 사람은 밤새 인터넷을, 이혼과 이별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온 사람은 어느새 또다른 애인을 만든다. 그들에게 있어 계획에서 벗어난 여행이란 너저분한 일상과 다를바가 없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비참해지는 일이다. 그런 그들에게 여행의 목적 따위는 눈처럼 녹아버려 사라진지 오래다. 더이상 히말라야의 설산은 그들에게 아무런 영감을 주지 못하는, 험하고 무서운 산일 뿐이다.

 

여행이란 결국 일상으로의 복귀를 의미하기에 그들의 타락아닌 타락을 이해 못할바는 아니다. 보통 사람에게 여행이란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잠시동안의 외출일뿐이니까. 하지만 알 수 없다. 일상의 힘이란 그렇게도 강한 것이란 말일까?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찾는 것이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 속에 이미 자신이 찾는 답이 있다는 말일까? 인간이란 결국 나약한 존재이므로 잠시나마 일상을 떠나있지 않으면 일상이라는 괴물에 언제 먹혀버릴지 모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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