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동굴을 숨기고 있는 산

시월의숲 2009. 10. 13.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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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에 있는 대금굴을 보고 왔다. 보고 왔다는 말이 맞을까? 동굴 속에 들어가 본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경치를 둘러보고 왔다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 든다. 수억년 전에 생성된 동굴 속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먼지보다도 가볍고, 찰나보다도 빠른 우리의 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유구하고 장대한 시간의 흐름이 축척되어 만들어진 석순들. 그 시간의 결정체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우리들은 우리 자신이 벼락처럼 짧은 순간 반짝했다가 이내 소멸하고 마는 존재임을 여실히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깨달음은 생각처럼 헛되다거나 슬프지 않다. 다시 동굴 밖으로 나와 눈부신 햇살을 맞을 때, 우리들은 들어갈 때의 나와 미묘하게 달라져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 우리는 이미 수억년 전의 기억을 들여다 보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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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야지대와는 달리 산간지대의 풍경들은 보다 간절한데가 있다. 같은 집이라도 너른 논과 밭으로 펼쳐진 곳에 지어진 집과, 수많은 나무와 깊은 계곡과 바위로 둘러싸인 곳에 지어진 집은, 설사 같은 모습의 집이라 하더라도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너른 평야는 안정감과 평온함 혹은 나른함 주지만 가파른 산야는 불안함과 애절함, 고립감 등의 감정을 전해주는 것이다. 산이 많은 지역을 차를 타고 돌아다녀보니, 산이 주는 깊은 단절감이 전해져온다. 저 산 너머에는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산 너머의 사람이 그리워 소리라도 질러볼라치면, 산의 꼭대기까지 숨이 차도록 올라가야만 한다. 그렇게 올라간 후, 있는 힘껏 소리쳐보지만 안타깝게도 소리는 그에게 가 닿지 못하고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올 뿐이다. 소리를 삼키는 산, 동굴을 숨기고 있는 산, 물이 흘러내리는 산. 산은 항상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동물과도 같다. 그 동물은 늘 낮고 깊게 숨을 내쉬고,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며 꼼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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