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어둠 속에서

시월의숲 2009. 10. 19. 21:04

집 앞 골목길에 있는 가로등 하나가 꺼진 것일까? 생필품을 사러 마트에 갔다 오는 길에 유난히 짙은 어둠이 골목 곳곳에 침범해 있음을 느낀다. 어둠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고, 손에 잡힐듯 꿈틀거리며, 닿는 모든 것을 삼켜버릴듯 짙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심하게 부는 바람이 어두워진 골목길을 더욱더 비현실적으로 어둡게 만들어서, 자취방으로 오는 짧은 순간의 길이 계속 이어질 것만 같은 불길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 어둠은 단지 가로등이 하나 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나의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부에 치명적인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이었다. 고양이의 발걸음과도 같은 은밀함과 고양이의 눈동자와도 같은 치명적인 무언가를.

 

 

어둠에 완전히 삼켜지기 전에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불길함이나 두려움 같은 것이겠지만, 어둠에 완전히 삼켜졌을 때, 다시 말해 어둠과 하나가 되었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실로 쾌락과도 비슷한 안락함일 것이다. 내가 느낀 알 수 없는 감정은 어둠에 몸을 숨기고 싶은, 어둠과 하나가 되고 싶은 나의 내밀한 욕망과도 결부되어 있다. 나는 왜 나를 어둠 속에 숨기려 하는가? 왜 스스로 어둠이 되려 하는가? 시간이 갈수록 서서히 내 목을 조를 것이 분명한 징그러운 손길을 뿌리치고 차라리 어둠이 되어 사라져버리고 싶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어느 누구에게도 나는 구원받지 못하리라.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구원을 바라지 않으리라. 그 어둠의 출처는 바로 다름아닌 나의 내면이므로.

 

 

 

*

 

 

 

나를 그냥 숨쉴수 있게 내버려 두세요. 당신이 나를 바라볼 때의 눈빛과 나를 위한다며 하는 말들이 오히려 나의 숨을 막고, 눈을 가리며, 내 목을 조른다는 사실을 당신은 정영 모르시나요?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생일  (0) 2009.10.24
가을 탓  (0) 2009.10.22
글을 쓰려면  (0) 2009.10.15
동굴을 숨기고 있는 산  (0) 2009.10.13
적당량  (0) 2009.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