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성탄 특선 다짐

시월의숲 2009. 12. 25. 18:15

그동안 책을 두 권 읽었고, 영화를 몇 편 보았다. 그래놓고도 꿀먹은 벙어리처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읽거나 보고 나서 떠오른 생각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머릿속에서 옅어졌고, 지금은 희미한(!) 기억밖에 남질 않았다. 아, 나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책을 읽고, 영화를 보았던 것일까. 단지 그 순간의 즐거움 때문에?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단지 어떤 느낌과 생각에 대해 기록하는 행위만으로 나는 어떤 의미를 찾으려 하는 것일까? 삶을 사는 것 자체가 어쩌면 의미를 지워가는 일일지도 모르는데. 이런저런 미련과 아쉬움이 머릿속에 맴돈다.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구속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러한 구속은 내가 바라던 바인가, 그렇지 않는가. 맞잡은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린 다음, 허리를 뒤로 꺾고, 앉은 채로 기지개를 켜다가 왼쪽 어깨에 급격한 통증이 왔다. 그래, 나는 살아있고, 살아있음으로 읽고, 보고,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건 그런 것들이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머릿속 생각들을 몰아내고, 그저 이 순간을 살면 된다. 그렇게 읽고, 그렇게 보면서. 무언가를 기록하는 것에 집착하지 말자. 무엇을 위해? 누군가에게 자신의 똑똑함과 세련된 취향과 독특한 개성과 지적 허영을 과시하기 위해 읽고, 보고, 쓴다면 그보다 추한 것이 어디 있을까. 실제로는 전혀 똑똑하지도, 그렇다고 세련되지도 않으면서. 아, 하지만 추한 것들에게도 하느님의 축복이 있기를. 오늘만은 좀 너그러워져도 좋을 날이 아닌가. 나 자신에게조차. 이것은 아무 의미없는, 성탄절 특선 다짐이다. 뜬금없다고?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9년이여 안녕, 그리고   (0) 2010.01.01
떠나는 자와 남겨진 자  (0) 2009.12.31
부산에 다녀오다  (0) 2009.12.25
북쪽 거실  (0) 2009.12.16
늘 행복하기를  (0) 2009.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