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부산에 다녀오다

시월의숲 2009. 12. 25. 18:07

생애 두 번째로 부산을 다녀왔다. 꽁꽁 얼었던 날씨가 제법 풀려서 돌아다니기 좋은 날이었다. 부산, 하면 영화의 도시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일까? 부산의 모든 건물들, 거리들, 사람들에게서 어딘가 극적인 면이 풍기는 것 같았다. 대도시인데도 불구하고 산 밑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아파트와 상가들을 볼 때나, 경사가 심한 도로를 지나갈 때, 해운대 근처의 으리으리한 호텔들과 광안리 바닷가 근처의 술집 등이 대조되어 보일 때, 특히 그러했다. 커다란 괴물의 내장을 뚫고 지나가는 느낌이랄까? 부산은 하나의 거대하고 드라마틱한 괴물 같았다. 적어도 내가 부산의 어느 거리를 걸어가고 있을 때 문득 들었던 순간적인 생각들 속에서는. 인간이란 종족은 흩어져서는 살아갈 수 없다지만, 부산같은 대도시에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을 대할 때면 인간이란 종족은 참으로 하찮은 존재일 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각자 고유의 개성을 간직한 인간이라기보다, 거대한 도시 속에 살아가는 익명의 존재들일 뿐이며, 존재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너무 미미한, 모두 다 같은 얼굴을 하고 걸어다니는 유령들처럼 보이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백화점이라는 센텀시티 속의 사람들과 어둠이 내린 해운대 바닷가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방황하는 영혼들과, 밤이 되면 더욱 화려해지는, 하지만 운명적이고 치명적인 남루함을 감출길 없는 수많은 모텔들의 불빛과 그 아래를 비틀거리며 지나다니는 사람들. 하지만 나는 부산이라는 도시의 한 쪽 귀퉁이만을 보았을 뿐, 그것이 다는 아닐 것이다. 수많은 사람을 품고 있는 곳은, 어쩌면 진부할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다양한 사연들을 또한 품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이 부산이라는 곳에 발을 디디게 해준 어떤 사람과의 인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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