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우리는 모두 하얗습니다

시월의숲 2010. 1. 12. 23:36

*

눈이 참 더디게 녹는다. 내 자취방 마당 한 구석에는 아직도 하얀 눈이 쌓여있고, 바닥에는 치우지 않은 눈이 밟히고 밟혀서 빙판이 되어 버렸다. 출근을 할 때면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어서 대문까지 당도한 다음에야 집 밖으로 확신에 찬 발걸음을 옮길 수 있다. 내 자취방의 마당 뿐만 아니라 거리엔 아직도 폭설로 인한 잔해가 여기저기 눈에 띈다. 아직 기온이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일까? 여기저기 녹지 않은 눈을 볼 때면 언제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린 적이 있냐는듯, 언제 인간세상을 혼란에 빠뜨렸냐는듯,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것만 같다. 아니, 우리는 이렇게 하얀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지만 눈은 밟으면 밟을수록 강해지고, 끈질겨진다. 사람들에 의해 밟힌 눈은 기온이 올라가지 않는 이상, 강하고 단단하게 뭉쳐서 결국 다이아몬드 같은 얼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거기다 곡괭이를 들어야 하는가? 특별한 위험이 없는 한 그냥 순리대로 녹게 놓아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그 위를 조심스럽게 지나다니면 된다. 길 어느 한 군데 녹아있는 곳이 있다면 그리로 다니면 될 것이고. 어쩐 일인지 자꾸 하얀 눈에 마음이 간다. 그럴 수 있다면, 눈의 편이 되고 싶다. 적군이 아니라 아군이 되고 싶다. 눈에 순응하고 싶다. 겨울에 눈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만큼 우리가 슬퍼해야 하는 일이 또 있을까?

 

 

*

예전에, 시를 쓴다는 한 후배가 내게 한 말,

'우리는 모두 하얗습니다' 라는 말.

우리는 정말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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