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시월의숲 2010. 1. 22. 00:08

*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

기형도의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기형도의 시집은 머리맡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어 보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새로운 구절이 용수철처럼 튀어나온다. 아, 새로운 구절이라는 말은 틀렸다. 몇 번을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시의 몇몇 구절이 새로운 느낌으로,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한 낯선 얼굴로 내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것이 기형도 시만의 매력일까? 나는 아직 그의 유일한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입' 만큼 강력한 마력을 가진 시집을 읽어보지 못했다. 그의 시는 읽을 때마다 늘 현재진행형의 불안과 그 불안을 감싸안는 위안이 동시에 느껴진다. 하지만 그 위안은 쓸쓸하고, 때론 슬프며, 비극적인 운명에의 예감 같은 것을 품고 있다. 마치 내 속의 불안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 그가 포착한 불안이 점차로 내게 전이되고 있는 느낌, 그런 느낌이. 이런 느낌은 시간이 흐른 후 또다시 그의 시집을 집어 들었을 때 지금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기형도의 시집 속에는 다양한 단어들의 조합이 나오는데, 그것들은 하얀 조약돌처럼 빛이 나서 나는 그것을 줍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 그에 의해서 걸러지고, 조합된 단어들을 읽을 때면, 나는 무언가 자극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봐, 이렇게 일상적인 언어들로, 지극히 평범한 언어들의 조합으로 이렇게 반짝이는 빛을 발하게 할 수 있는걸. 반짝인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지. 반짝인다고 표현한다면 그의 시들이 모두 밝다고만 생각하기 쉬운데, 결코 그렇지는 않거든. 오히려 그의 시어는 글을 쓰게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 무언가를 끄적이게 하는 힘, 내면의 무언가를 출렁이게 해서 그것을 넘치게 하는 힘을. 그렇게, 누군가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지금도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라는 싯구로 인해 이런 글을 쓰고 있는걸 보면. 이것이 비록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글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게 나는 기형도의 안내를 받아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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