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기억

시월의숲 2010. 1. 18. 14:57

*

집에 다녀왔다. 버스를 타고 고개를 넘어가는데 아직도 녹지 않은 눈이 산과 들판에 남아 있었다. 털실로 짠 굵은 목도리가 좀 거추장스럽다고 느껴질만큼 기온이 올라가서 숨 쉬기가 한결 수월했다. 할아버지의 이른여덟번 째 생신을 맞아 흩어졌던 가족들이 오랜만에 한 집에 모였다. 작은 아버지의 자식들, 그러니까 내 사촌들과는 참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벌써 대학생과 고등학생이 된 사촌들이었지만 어렸을 적 보았던 애띤 얼굴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한편으로는 반가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색했다. 맞댄 얼굴은 낯설었고,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말수가 적었고, 가끔 한 마디씩 하는 대답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만큼 목소리가 작았다. 나는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해 예전 기억을 되살려 이런 저런 이야기를 꺼내 보았지만, 그들은 생각이 날듯 말듯한 모호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요? 라는 표정으로. 내가 하는 말들은 허공으로 흩어지고, 그들과 나 사이에 남겨진 것은 흩어진 말들의 잔해로 만들어진 깊은 단절과 허무뿐. 내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인가?

 

 

*

사실 과거의 기억들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타인에 대한 기억은 다름아닌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바로 그 사람에게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 사람과는 상관없는 오로지 나 자신만의 이야기일 뿐이다. 우연히 서로의 기억이 일치하여 깊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서로의 기억이 우연히 비슷한 것이었을 뿐, 그래서 잠시 서로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렇게 우리들의 기억은 빗겨나간다. 서로의 기억만을 간직한 채,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타인의 인상만을 가질 뿐이다. 그러니 오랜 시간 함께 생활하며 추억을 만든 사람들이 역시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서로의 추억을 이야기할 때, 공통된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하여도 그리 슬퍼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사실은 저 산과 들에 녹지 않는 눈처럼 너무나 명백하게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만났다는 사실이며 지금부터 새로이 '각자의 추억'을 만들어가면 된다는 사실이다. 기억은 그렇게 우리들의 가슴 속에 스며들어 비로소 이기적인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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