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그렇게 작고, 가볍고, 햐안 눈이

시월의숲 2010. 1. 5. 00:09

늦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밖에 눈이 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오다 말겠지 했는데, 눈발이 더 심해지더니 오후 늦게나 되어서야 눈이 그쳤다. 오랜만에 많은 눈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텔레비전에는 대설특보가 내린 강원 영동 산간 지역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도로는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눈 때문에 거의 주차장을 방불케 했고, 강원도 산골 마을에는 버스가 끊겼으며, 공항에는 뜨지 못한 비행기와 발이 묶여버린 여행객들의 안절부절한 모습이 교차되고 있었다. 가볍고, 햐얘서 전혀 해가 없을 것 같은 눈도 저렇듯 쌓이기 시작하면 정말 무섭게 변하는구나, 새삼 느꼈다. 오늘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서 낮에 내린 눈이 얼어붙을 것이라고 텔레비전 속 기상 캐스터가 말했다. 이렇게 눈이 오는 날, 나는 10시까지 늦잠을 잤고, 늦은 아침을 먹은 후, 미장원에 가서 머리카락을 잘랐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집에 오는 길에 토스트와 바나나주스를 샀다. 거리에는 빗자루를 들고 눈을 쓰는 사람들과 버스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구르고 있는 사람들, 거북이 걸음으로 가고 있는 차들이 뒤섞여 있었다. 눈은 쉬이 그치지 않고, 눈을 치운 도로 위에 또다시 내렸다. 나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집에 돌아와 눈삽을 들고 마당의 눈을 치웠다. 주인 할머니는 서울 아들네 가고 나혼자 집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눈을 쓸지 않아도 뭐라할 사람은 없지만. 눈을 치우다가 갑자기 눈사람이 만들고 싶어서, 방에 들어가 목장갑을 가지고 나왔다. 눈은 생각보다 쉽게 뭉쳐지지 않았다. 여러번의 시행착오 끝에 눈덩이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눈덩이가 점점 커지는만큼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두 개의 눈덩이를 알맞게 뭉쳐서 드디어 눈사람을 완성했고, 완성된 눈사람을 내 자취방 문 옆에다 놓아 두었다. 눈사람을 만들어놓고 보니, 보일러 기름을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동안 생각했던 것인데, 하필이면 눈이 펑펑오는 오늘 같은 날이라니. 기름이 얼마나 남았나 보니 거의 바닥이었다. 혹시 눈 때문에 배달이 안되면 어떻하나, 걱정되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배달은 되는데, 눈 때문에 석유차가 가질 못해서 말통으로 배달하고 있다고, 그거라도 괜찮겠냐고 주유소 아저씨가 말했다. 나는 괜찮다고, 그렇게라도 배달해주시면 고맙다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유소 아저씨가 당도했고, 말통에 담아 온 기름을 두 통 넣었다. 등유를 가득 담은 통을 들고 온 아저씨는 내가 만들어놓은 눈사람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나는 방에서 따뜻하게 보낼 수 있겠지만, 밖에 있는 눈사람은 밤새 내려간 기온 때문에 꽁꽁 얼어붙겠지. 눈사람에게는 녹는 것보다는 그 편이 더 나으려나? 누군가에는 눈이 눈싸움을 하거나, 눈사람을 만드는 재료일 뿐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목숨마저 앗아갈 수 있는 것이 되기도 하다니. 그렇게 작고, 가볍고, 하얀 눈이 인간들의 세상을 순식간에 혼란 속으로 빠뜨려버리다니. 그렇게 작고, 가볍고, 하얀 눈이.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는 모두 하얗습니다  (0) 2010.01.12
아픔을 대하는 방식  (0) 2010.01.10
2009년이여 안녕, 그리고   (0) 2010.01.01
떠나는 자와 남겨진 자  (0) 2009.12.31
성탄 특선 다짐  (0) 2009.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