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때때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시월의숲 2010. 1. 27. 21:12

*

오랜 여행을 하는 자에게 피곤이란 친구와도 같은 것이리라. 그리 긴 여행도 아니었는데, 여행을 다녀온 그날 저녁, 머리를 바닥에 대자마자 정말 죽은 듯이 잠에 빠져버렸다. 진영과 삼천포, 창원, 울산과 안동을 거쳐 예천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차 안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여행을 하는동안 때때로 불쑥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긴, 그 먼 물리적 거리를 단 시간에 돌파한만큼, 그것은 내가 감내해야만 하는 피로이리라. 김해의 클레이아크 미술관과 삼천포대교와 독일마을도 기억에 남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봉하마을이다. 고 노무현 전대통령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 봉하마을은 겨울이라는 계절탓인지 무척이나 쓸쓸하고 휑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가 몸을 던졌다는 부엉이 바위 아래 세워져 있는 비석 앞에서 어떤 이는 절을 하고, 어떤 이는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마을 입구에서 사들고 온 하얀 국화를 그의 사진 옆에다 올려 놓고 몇 걸음 물러나와 얼마동안을 그냥 그렇게 서 있었다. 어디선가 엄숙하면서도 애달픈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왔고, 내가 오랫동안 바라보았던,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그의 얼굴이, 봉하마을을 벗어나서도 한동안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때때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었다.

 

 

*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가도 막상 벗어나면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상황이 반복될 것이다. 나는 다시 돌아왔지만, 돌아온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닐 것이다. 이건 그리 거창한 말이 아니다. 일상으로 복귀하기 전, 여행에서 보았던 풍경들과 지나쳤던 사람들, 몇몇 사람들과의 대화와 그 모든 것들의 분위기, 느낌 같은 것들은 일상으로 돌아온 나에게 새로운 힘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다. 그런 여행의 자극이 일상을 견딜 수 있게 하고, 때론 일상이 위대한 것임을 일깨워주지 않겠는가. 사실 그리 위대한 일상이 아니라 해도. 아니, 이런 저런 말들이 다 진부하다. 그저 삶을 지속시킨다는 말로 충분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렇게 살아가고, 또 살아가기 위해 가끔씩 여행을 할 것이다. 여행에서 오는 피곤이 아직 친구처럼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나는 '여행생활자'보다는 '생활여행자'에 더 가깝지 않나 생각되기도 한다. 물론 나는 아직 여행이나 생활 둘 다 미숙하기 그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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