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시월의숲 2010. 2. 1. 17:30

털갈이를 하듯 시간이 내 몸 속에서 숭숭 빠져나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벌써 2월. 하지만 읽고 있는 책은 잘 읽히지 않는다. 두 권의 책을 동시에 읽고 있기 때문일까. 인문학 서적 한 권과 소설 한 권. 소설을 읽다가 지겨워지면 인문학 책을 펼쳐들고, 그게 싫증이 나면 다시 소설을 읽는다. 아주 더디게. 내 독서방법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책을 읽고 있으면 어느 순간 책 속의 내용은 사라지고 그저 글자만 따라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 앞 문장으로, 앞 페이지로 넘어가게 되고. 책이 어렵기 때문일까? 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심오하기 때문에? 때때로 머리속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 들어 불안하다. 빨리 읽고, 많이 읽는것이 능사는 아니겠지만 이건 그런 종류와는 좀 다른,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느낌이다.

 

이런 와중에 나는 또 서점에 가서 책을 샀다. 실로 오랜만에 발품을 팔아 책을 구입한 것이기 때문에, 또, 라는 말은 적당치 않지만, 요즘 내 독서 성향으로 봐서는 그리 탐탁치 않은 일임에는 틀림없다. 책이 읽혀야 말이지. 어쨌거나 오랜만에 간 서점은 여전히 조용했고, 서점 직원은 텔레비전 보는데 여념이 없었으며, 늘 그랬듯 내가 사고자 하는 책은 없었다. 소도시의 작은 서점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할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 최승자의 새 시집은 갖다놓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새로 주문을 해야한다는 말에 나는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집어 들고 서점을 나왔다. 언제 읽을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가지고 있다보면 언젠가는 읽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언젠가는 언제인가?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이상은은 노래를 불렀지만, 나를 통과한 시간들은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 그 당연한 사실이 때론 몹시도 쓸쓸하게 느껴지지만, 다시 책을 읽게하는 힘이 되게도 한다는 사실에 위안을 가져야 하리라. 그래, 내게 남은 모든 시간의 털이 다 빠져나가기 전에 읽고 또 읽자. 슬픔에 젖지 않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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