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내부에서 스스로 나오려는 것

시월의숲 2010. 3. 30. 20:56

1.

바람이 많이 분다. 3월도 거의 다 지나갔는데, 아직도 바람이 차다. 목련은 꽃봉오리를 하얗게 올리고 개나리도 하나 둘 피려고 하는데. 봄은 쉬이 오지는 않는가 보다. 이러다 금방 꽃이 지고 봄도 가버리겠지만. 늘 취할 틈도 주지 않고 가버리는 것이 봄, 아니던가. 이런 날, 누군가는 자살을 하고, 어디에선가 버스가 추락하고, 서쪽 바다에서는 함선이 무너져내렸다. 봄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 추운 날들이 아닐 수 없다. 봄은 어디에 있는가? 봄이 오기는 오는 것인가?

 

 

2.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다시 읽었다. 집에 내려갔다가 우연히 책장에 꽂힌 <데미안>을 보고 문득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전에 읽어서 어떤 내용이었는지 잘 기억나질 않았다. 유년시절에 겪은 심적 갈등, 두 개의 세계, 자신 안에 흐르는 냇물에 귀를 기울이는 것, 자신 안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대로 살려는 몸부림... <데미안>은 그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책이 다시금 나를 끌어당긴 것은 아마도 지난 며칠간 내가 느꼈던 일련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나는 싱클레어와는 반대로 어린 아이들에게서 두 개의 세계에 대한 간극을 느꼈던 것이다. 그 세계는 순수하게 폭력적인 세계였다. 아무런 거리낌이나, 갈등, 일체의 두려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순진무구한 폭력의 세계. 그 세계는 설명이 필요치 않았다. 크로머가 싱클레어에게 그런 존재, 그런 세계였듯이. 나는 어쩌면 <데미안>을 읽기 전부터 데미안을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하듯이. 그가 말하려는 것을 이제서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런데, 고작 이제서야. 아, 나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닐까?

 

 

3.

사고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사고가 일어난 후 발생하는 윤리적,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어떤 사건을 어떻게 잘 수습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잘 이용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정치인이라고 부른다. 슬픈 일이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반대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무마하려 드는 사람들이 바로 정치인들인 것만 같아서. 하지만 나는 그들이 처음부터 그러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법정 스님의 글을 읽고 감명을 받을 줄 아는 사람들인 것이다(그렇게 믿고 싶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선 자신 안에서 솟아나오는 것을 살려는 노력이 아닐까? 거대하고 더러운 검은 강물에 휩싸이지 않고.

 

 

4.

"나는 내부에서 스스로 나오려는 것대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왜 그다지도 어려웠던가?"

그래, 물론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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