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한없이 짜고 비린

시월의숲 2010. 4. 19. 21:36

바다가 바로 지척이면서도 가까이 가 보지는 못했는데, 오늘 마침 쉬는 날이고, 집에도 내려가지 않는지라 산책도 할 겸 답답한 방을 나왔다. 불과 50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바다였건만! 하늘엔 구름이 많이 끼어 있었고 바람이 제법 불었지만 시야가 흐릴 정도는 아니었다. 내 방에서 보는 바다와 바로 앞에서 바라본 바다는 느낌이 확연이 달랐다. 출렁이는 바닷물과 파도소리, 바다 위를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갈매기와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과 시야를 꽉 메우는 수평선. 바다의 그 모든 것들이 멀리서 보는 것과는 달리 내 몸 전체를 압도했다. 나는 그저 말없이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세게 불어서일까? 높은 파도의 물결과 거친 파도소리가 이따금씩 위협적으로 느껴져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모래사장에는 미역같이 검고 길죽한 해조류들이 제법 많이 흩어져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이 동네 사람들의 소행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무지에서 나온 생각일 뿐이었다. 모래사장에 앉아서 한참이나 바다를 바라본 후, 나는 그것이 바로 바다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았다. 밀려오는 파도 속에 뿌리 뽑힌 검은 해조류가 섞여 있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나는 저 멀리서 한 노파가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밀려오는 파도 속을 푹푹 찔러대는 것을 보았다. 몇 번이고 노파는 막대기를 바닷물에다 집어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는데, 어느 순간 막대기에는 검은 머리채 같은 해조류가 걸려있었다. 노파는 그것을 다른 손에다 옮겨 쥐고 막대기를 든 손으로는 연신 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다. 순간 바다의 짠 내음이 코를 자극했다. 이 바다는 해조류를 제 스스로 모래사장으로 내뱉어 놓는구나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유난히 더 짜고 비린 것 같은 바닷바람은 아마도 그것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나는 좀 더 짜지고 비려질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건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에게 이렇듯 오감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약간의 소금기는 필수적인 요소일 것이다. 짜고 비린 바다내음만큼 자신이 바다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을테니까. 몸은 썩어가도 정신은 썩지 않으리라. 내가 살아가는 한 저렇듯 출렁이리라. 한없이 짜고 비려지리라. 바다를 보면서 뜬금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래, 호흡! 내 들숨에 밀물이 들어오고, 날숨에 썰물이 빠져나간다. 바다와 함께 숨쉬는 것 같은 이 기분! 하지만 바다와 내가 결국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내 호홉은 언젠가는 끝나는 것이요, 바다의 호흡은 영원토록 지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렴 어떤가? 언제나 그렇듯, 중요한 건 내가 바다와 호홉을 같이 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다. 이 순간 나는 숨을 쉬고 있고, 바다는 나와 함께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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