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내가 말하는 고독

시월의숲 2010. 5. 7. 23:51

살아 있는 것들―또한 사물들―이 도피하여 숨어드는 은밀한 장소인 고독은, 셀 수 없이 많은 아름다운 모습을 거리에 안겨 준다. 예를 들어, 버스 안에 앉아 바라보게 되는 창 밖의 풍경이 그러하다. 버스는 급경사의 길을 내려가고 있고, 나역시 하나의 얼굴이나 몸짓에 머무를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를 타게 된다. 이렇듯 속도감에 실린 시선에 잡힌 사람들의 얼굴이나 몸, 태도들은 나를 위해 미리 준비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꾸밈없는 모습 그대로이다. 나는 기록한다. 아주 큰 키에 몹시 야위고 허리는 굽고 가슴은 움푹 파이고 기다란 코에 안경을 걸친 남자,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우울하게 걷고 있는 뚱뚱한 아주머니, 곱게 늙지 못한 노인네, 홀로 있는 아랍 남자, 그 곁에 역시 또 혼자인 아랍 남자와 그 옆에 또 다른… 회사원, 또 다른 회사원, 수많은 회사원들, 도시 전체가 등 굽은 회사원들로 가득 차고… 이 모든 것이 입가의 주름이라든가 피곤한 두 어깨 등 내 시선이 그려내는 그들의 세부화 속에 한데 모여진다. 질주하는 버스와 내 눈의 속도감으로 인해 사람들 하나하나의 태도는 이렇게 마구 그려진 아라베스크 속에 너무도 빠르게 포착된다. 그리하여 각각의 존재는 더없이 새롭고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는 언제나 마음의 상처가 내린 은총이다. 어렴풋하게 알아볼 수 있는 혼자만의 상처지만, 자신의 온 존재가 그리로 쏠리게 되는 고독을 체험한 것이다. 이렇게 나는 렘브란트가 연필로 그려낸 도시를 지나가는데, 이곳에서는 개개의 사람과 사물이 진정한 모습으로 포착되며, 그 뒤 멀리에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떨구어 놓는다. 버스 안에서 바라본―이 낱낱의 고독으로 이루어진―도시는 광장을 가로질러 걷고 있는 한 쌍의 젊은 연인을 마주치지만 않는다면 놀라운 생기를 그대로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허리를 껴안고, 여자는 조그만 손을 남자의 청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어 매력적인 포즈를 연출하고 있다. 바로 이런 우아하게 멋부린 제스처가 걸작의 한 면을 통속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내가 말하는 고독은 인간의 비참한 조건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밀스러운 존엄성, 뿌리 깊이 단절되어 있어 서로 교류할 수 없고 감히 침범할 수도 없는 개별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어렴풋한 인식을 의미한다.(장 주네, '자코메티의 아틀리에' 중에서)

 

 

 

*

 

 

책을 읽다가 문득 아, 하는 짧은 탄성이 새어나오고 두 눈은 놀라움과 황홀한 일치감에 나도 몰래 부릅떠지는 순간이 있다. 그런 구절이나 문장은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고, 자꾸만 반복적으로 읽게 된다. 위 문장을 읽는 순간, 이 내겐 그러했다. '뿌리 깊이 단절되어 있어 서로 교류할 수 없고 감히 침범할 수도 없는 개별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어렴풋한 인식'을 나도 느꼈던 것일까? 저 소통하지 못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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