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시월의숲 2010. 10. 2. 23:56

비가 오는 줄도 몰랐다. 아버지가 휴대폰 수화기 너머 거기 비 안오냐고 물었을 때에도 안오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베란다문을 여니 들려오는 빗소리. 어, 꽤 많이 오고 있잖아? 순간 놀랐다. 방 안에서 문을 꼭 닫고 있으니 빗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문을 닫아 놓아서가 아니라 일 때문에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부터 약속을 잡아놓고 있었던 사람이 전화를 받지 않으니, 이런 난감한 노릇이 또 있을까. 일단 연락이 되어야 그 다음 일을 계획하고 실행할 것이 아닌가. 오래 기다린 끝에 연락이 되었는데, 그 사람 말이 더 가관이다. 오늘 약속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칠보산으로 등산을 갔다니. 등산중이라 전화를 받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너무 어이가 없어 말이 다 나오지 않았다. 약속을 그렇게 쉽게 생각하는 사람과의 계약은 설사 그것이 성사된다 하더라도 다음 기회라는 것은 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 만나자고 다시 약속을 잡았는데, 그 날이 내일, 일요일이다. 주중에 늦게까지 일하는 것의 보상을 주말에라도 받고 싶었는데, 집에 와서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 이건 또 무슨 상황인지. 속상하다. 오로지 일, 일, 일에 신경을 쓰느라 살이 다 빠질 지경이다. 이렇게 투덜대고는 있지만 사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긴 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조금의 여유도 없이 일에 쫓기듯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내가 정말 이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는가 심각한 회의가 든다. 머리가 어지럽다. 비라도 실컷 맞으면 답답한 마음이 좀 가실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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