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낮은 숨소리

시월의숲 2010. 9. 16. 23:17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대해서 이야기할까?

 

지은지 이십 년도 더 된 주공아파트인데, 처음 이 집을 보기 위해 부동산 중개업자와 같이 왔을때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어. 우선 낡은 외관에 먼저 시선을 빼았겼었지. 아니, 처음엔 이 동네에 이런 아파트 단지가 있었나 의아할 정도였으니, 낡은 외관 정도는 그리 놀라울 것도 없었지만. 아파트 계단에 첫발을 디디면서부터 낡은 것들이라면 으레 풍길법 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어. 설명할 순 없지만 낡고 오래된 것들만이 지닐 수 있는 특유의 냄새 같은 것 말야. 전혀 청소를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한 계단엔 여러 종류의 전단지들과 편지들, 알 수 없는 종이 뭉치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어. 흙과 먼지, 쓰레기들을 이리저리 헤치며 우리들은 계단을 올라갔어. 그리고는 삼층에서 발길을 멈췄지. 고작 오층 밖에 안되는 아파트의 가운데 층에 바로 내가 일 년간 살아야 할 방이 있었지. 중개업자가 문을 열려고 했지만 어쩐 일인지 잘 열리지 않았어. 그는 열쇠를 몇 번이나 이리 꽂았다 저리 꽂았다 하더니 마지막으로 아주 신중히 오른쪽으로 돌리더군. 그제서야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지. 그렇게 들어간 방은... 그러니까 한마디로 그리 최악은 아니었어. 주인이 월세를 놓을 목적으로 낡은 아파트지만 여기저기 손 본 흔적이 보였거든. 벽지가 새로 발라져 있었고, 바닥과 천장, 싱크대의 이음새 부분 등이 그런데로 마감되어 있었어. 나는 전기가 들어오는지 물은 잘 나오는지 확인한 다음, 중개업자에게 다른 곳을 좀 더 돌아본 뒤에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했어. 내가 이 고장에 와서 가장 먼저 본 방이었거든. 하지만 내 마음 속엔 이미 이곳을 내가 살 집으로 생각하고 있었나 봐. 다른 곳을 둘러봐도 맨처음 내가 봤던 낡은 아파트가 계속 생각났으니 말이야. 왜 그랬을까? 나도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르겠어. 다만 낡고 오래된 것들에게서 풍기는 냄새, 처음 내가 이 아파트에 발을 디뎠을 때 맡았던 그 냄새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만 들 뿐. 그게 아니라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베란다 밖의 커다란 나무 사이로 비춰들어오던 오후의 눈부신 햇살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 그것도 아니라면 낡은 계단과 낡은 문, 온통 낡은 것들 사이에서 홀로 빛을 발하던 새하얀 벽지 때문이었는지도. 그래서 어쨌든 나는 지은지 이십 년도 넘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어. 물론 일 년이라는 기한이 있지만. 일 년 후의 일은 그때가서 생각하려고 해.

 

내 방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온갖 소리들이 들려와. 조용하기 그지없는 동네지만, 그래서 더욱 여러가지 소리들이 들려오지. 윗층에서 쿵쿵거리는 소리나 관을 타고 떨어지는 물소리(얼마나 콸콸거리는지!), 수돗물을 트는 소리,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왁자지껄한 웃음 소리, 누군가의 말소리나 차가 지나가는 소리 등등. 어제 옆 집 아이는 집에 늦게 들어온 모양이더군. 아이의 엄마인 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노여움과 걱정스러움이 동시에 느껴졌어. 너 지금 몇 시인줄이나 아니? 아직도 시내란 말이야? 택시타고 빨리 들어와! 미쳤군, 미쳤어. 여학생이 혼자 밤 늦게 집에도 안들어오고... 니가 지금 이럴 때니? 그녀의 목소리에는 늘 무언가에 치이고 피로한 자의 한숨이 섞여있어. 그래서 듣고 있는 내 가슴이 다 무거워지곤 해.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문득 이 아파트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는 소리를 듣고 살아야 했을까 궁금해져. 얼마나 많은 사연이 아파트의 갈라진 틈 사이로 흘러들어가 아파트의 일부가 되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때면 나는 내 방의 벽에 가만히 귀를 대보곤 해.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을까? 수신인을 잃은 편지처럼 전해질 무언가가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때론 몹시 궁금해서 견디기 힘들 정도야. 그렇게 벽에다 귀를 대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늙고 지친 동물의 낮은 숨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곤 해. 아마도 그건 벽의 갈라진 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건물의 오래된 숨결이겠지. 그럴때면 나는 생각하지. 이곳에서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나는 이곳에서 늙고 지친 한 마리 거대한 동물과 함께 살고 있다, 고. 언젠가는 무너져내릴 운명을 지닌 동물. 그건 모든 인간들의 운명이기도 하지. 아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의 운명이라고 해야할까? 거기엔 인간관계에서 나오는 불평등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아. 다만 그 운명이 빨리 찾아오느냐 늦게 찾아오느냐의 차이만 있을뿐, 우리는 모두 무너지고 있어. 나는 어쩐지 이 아파트가 마음에 들어. 언젠가 너도 초대할께. 내가 두 손을 잡을 수 있도록 너는 빈 손으로 오면 돼. 그러면 너는 동물이 내는 오래되어 익숙한 존재의 냄새와 낮은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거야. 내가 약속할께. 그런데 너, 너는 어디에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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