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날에

시월의숲 2010. 12. 28. 20:19

눈이 온 줄 몰랐다. 아침에 일어나 차가운 냉기를 느끼며 창문을 열어보니 온통 눈으로 덮힌 하얀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오늘은 일상적인 출근 대신 다른 도시로 출장을 가야했기 때문에 눈을 봐도 마냥 즐겁지가 않았다. 눈은 그쳐 있었기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파트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기 시작하더니 점점 더 커지고 거세지기 시작했다. 걱정스런 마음으로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발을 동동굴리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타려고 마음 먹은 버스의 출발시간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나는 연신 휴대폰 폴더를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드디어 버스가 도착했고 사람들은 벌떼처럼 버스로 달려들었다. 나는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기만 하고 정작 버스를 타지는 못했다. 이미 사람들로 꽉 찬 버스에 내 몸을 구겨넣을 엄두가 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두, 세 대의 버스를 놓치고(보내고), 사람들이 어느정도 사라진 뒤에야 나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늦어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가서 다시 시외버스로 갈아타고, 다시 택시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하는데 거의 반나절이나 걸렸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교육은 시작되지 않았고(나를 그토록 고생하게 만든 눈 때문에) 내가 도착하고도 이삼십 분이 지난 후에야 교육이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눈 때문에 고생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당연한 사실에 나는 왜 그리도 안절부절못한 것인지.

 

이렇게 눈이 많이 온 날,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눈을 맞으며 버스를 기다리고, 버스에 타서도 사람들에 치이고, 눈 때문에 버스는 달리지 못하고, 버스 안에서 본 사람들의 얼굴과 텁텁한 공기, 질척이는 도로를 걷다가 몇 번이나 미끄러질뻔 하고, 낯선 도시에서 낯선 택시를 타고, 낯선 사람들과 마주치고, 그들과 밥을 먹고, 아무 의미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들으면 한숨만 나오는 교육을 듣고, 내가 해야 할 일 때문에 우울해하고, 다시 차를 타고, 걸으면서, 그러면서 계속 떠올랐던 생각은 엉뚱하게도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건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한다는 뜻도 아니고 가족간의 사랑이나, 친구와의 사랑 뭐 그런 포괄적인사랑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사랑하는 이가 없어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데, 이는 곧 사랑이라는 소통방식의 어떤 불가능성, 일방성, 한시성, 폭력성, 환각성, 소모성에 지배받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사랑이 없는 삶은 아스팔트처럼 무미건조할 것인가? 아니면 결국 마음의 문제인 뿐일 것인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곧 사랑의 완성은 아니리라. 하지만 삶의 돌파구를 찾아내는 것 또한 중요하고도 시급한 문제다. 그것이 반드시 사랑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나? 그렇다. 결국 이 모든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 내가 이렇게 유치하고, 엉뚱하며 감상적인 말들을 쏟아내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바로 눈! 나를 질척이게 하고, 비틀거리게 하며, 미끄러지게 한 바로 그 눈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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