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시월의숲 2011. 1. 4. 22:52

자고 일어나니 2011년이 되었고, 새해 첫날 나는 장염에 걸려 응급실까지 갔었다. 장염은 내 오랜 친구와도 같이 잊어버릴만 하면 한번씩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 때문에 나는 조금 지쳤고, 때로 피곤했으며, 그래서 잠이 많이 모자라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책을 읽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으며, 텔레비전도 보지 않는다. 아니 책이 읽히지 않고, 음악도 들리지 않으며, 텔레비전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인터넷 세상만 들락거리고 있지만 그것도 그닥 신통하지는 않다. 모든 것들이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시들어가고 있다. 사실은 내가 시들어가고 있는 것일테지.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아팠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와서 방을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만난 한 여승이 생각난다. 파리한 얼굴에 버짐이 피고 무척이나 말랐지만 목소리만은 청아했던 여승과 그녀가 살고 있던 방. 금방이라도 쓰러져버릴 듯 낡은 한옥집에 하나라도 더 세를 받기 위해 나눠놓은 방들 중 제일 가운데 방에서 여승은 살고 있었다. 짐들은 모두 상자에 담겨 있었고(사실 처음부터 풀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벽지는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으며 형용할 수 없는 퀴퀴한 냄새가 온방에 진동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어요, 이래뵈도 방이 넓어요, 불편한 건 화장실이 바깥에 있고, 재래식인데다가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지만 그건 살다보면 익숙해질거예요, 내가 원래 지병이 있었는데 여기 살면서 다 고쳤어요. 여승은 조금만 후 불어도 꺼저버릴 듯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나는 그런 여승의 얼굴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 그 방에 고여있던 특유의 냄새와 잘 열리지 않던 재래식 화장실의 나무문짝과 마른 버짐이 잔뜩 핀 여승의 얼굴과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그녀의 목소리가. 나는 그곳에 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서둘러 집을 나왔었다. 만약 내가 그곳에서 살았다면, 지병을 고쳤다던 여승처럼 나의 잔병도 말끔히 나았을까. , 그 방에는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오디오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아직 봉하지 않은 상자 속에 담긴 몇 권의 책과 회색의 승복과 흰 고무신 몇 켤레 뿐. 이 모든 것들이 떠오르는 것이 단지 내가 아팠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너무나도 쉬운 핑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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