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김도언, 《불안의 황홀》, 멜론, 2010.

시월의숲 2011. 7. 9. 18:03

나는 나의 삶을 꾸준히 바라보고 다른 이의 삶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거개의 삶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단계를 거쳐 완성되거나 종료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원리의 발견 같은 것인데, 내 신념에 의해서 확인된 네 가지의 단계는 '욕망-투쟁-성찰-화해'이다. 나는 이것을 '진화의 변증법'이라고 부르고 싶다. 재미있는 사실은 사람마다 각 단계에 머무르는 시간에 있어 현격한 편차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은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네 단계를 모두 섭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욕망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투쟁의 단계를 이십 년 이상 지속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투쟁의 단계를 일 년 만에 졸업하기도 한다. 내 생각에 의하면, 욕망과 투쟁의 단계에 머무는 시간이 짧고 성찰과 화해의 단계에 머무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 사람의 삶은 윤리적으로 훌륭한 삶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예술 혹은 미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떤 삶이 더 낫다고 확정할 수 없다. 흔히 말하는 예술적 각성은 욕망하거나 투쟁하는 과정 속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지, 성찰하거나 화해하는 과정 속에서 일어날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피카소가 위대한 화가가 되 수 있었던 것은 구십이 넘은 나이까지 그가 끝없이 욕망하고 투쟁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젊은 날에 성찰과 화해의 단계까지 마쳐 '철든' 피카소로 중년 이후의 삶을 살았다면, 그가 훌륭한 인격자는 되었을지 몰라도 위대한 화가는 결코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런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사실 욕망과 투쟁, 성찰과 화해는 곧 그 사람의 고유한 자질의 표현이라는 것.(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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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 때는 스무 살이 어른인 줄 알았고, 스무 살 때는 서른 살이 어른인 줄 알았으며, 서른 살 때는 마흔 살이 어른이겠다 싶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와 같은 생각은 너무 순진하고 안일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어른이 자기긍정과 타자에 대한 전폭적인 이해를 완성한 존재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에게 어른의 시절은 없는 듯하다. 불안의 정도, 불안의 깊이가 다를 뿐이고, 사람들은 모두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어느 순간 죽음과 직면할 뿐이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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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종종 인간들은 모두 똑같은 생각에 사로잡힌다. 자신이 느끼는 고통이 가장 크고, 자신의 희망이 가장 간절한 것이라고. 불행한 일이지만 그런 생각은 대부분 틀린 것이다. 우리가 사는 과정에서 크거나 작은 것 혹은 간절하거나 간절하지 않은 것으로 구분할 수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진술마저도 삶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 어떤 가능성 있는 해답의 정보를 주지 못한다. 영원히 일어나지 않은 일은 일어난 일보다 훨씬 많고, 우리는 그것의 실체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의 고통이 가장 크고, 나의 희망이 가장 간절한 것이라고 믿는 것은 삶에 대한 자신의 불성실과 무례함을 드러내는 일 외엔 아무것도 아닌 셈이다.(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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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사무실은 고요하다. 형광등 하나가 수명이 다했는지 깜박거리고 있다. 나는 문학의 8할 정도가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남겨진 자의 상상력과 몽상에 의자하면서 탄생된다고 생각한다. 이성의 규범과 관습이 작용하는 일상의 공적인 공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시공을 갖게 되었을 때, 우리는 무언가 다른 생각과 행위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깊은 밤의 초등학교 운동장이나, 일요일의 텅빈 사무실 같은 곳에서 우리는 은밀하고 병적인 욕망을 키우고 있는 원초적인 에고와 마주치는 극단의 기회를 제공받을 수도 있다.(22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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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은 자신이 낸 상처를 보고서야 자신이 아팠다는 걸 깨닫는 나이다.(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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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나는 다만, 존재의 긍정으로서의 사랑을 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른 새벽, 창가를 두드리는 믿을 수 없이 향기로운 바람의 기척에 눈을 뜰 때, 내가 아직 살아 있다고 안도할 때, 나는 내가 사람들이 모두 하찮다고 말하는 무엇인가를 외롭게 사랑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나는 그 희망만으로 살고 싶었다. 내 몸이 기쁘지 않을 때에도 내 영혼은 지극한 자존심의 호위를 받으며 어둠 속에서 단단한 사랑의 결정이 되어갔다.(316~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