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원인을 알 수 없는 핑핑

시월의숲 2011. 9. 9. 23:04

추석이 다가왔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대신 오늘은 하루종일 흐렸고 간간히 비가 내렸다. 추석연휴 내내 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오거나 흐릴 것이라고 텔레비전은 떠들어댔다. 올해도 둥근 보름달을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어제는 갑자기 어지럽고 속이 매스꺼워서 병원에 갔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는 내 귓속에 있는 달팽이관에 문제가 있다면서 무리하지 말고 약을 먹고 쉬라고 했다. 어제는 정말 모든 사물이 핑핑 도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병명을 말해 주었는데 무슨 말인지 잊어버렸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라고 했다. 항상 그런 식이다. 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인을 알 수 없는데 치료가 가능할까? 의문이 들었지만 묻지 않았다. 5일치의 약을 지어서 집으로 돌아와 쓰러지듯 누워서 잠을 잤다. 정말 죽은듯이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니까 세상은 정지해 있었다. 나는 점점 더 말라가는 것 같다. 더이상 마를 것도 없는데. 온 몸의 살이란 살은 죄다 말라버린 것 같은데. 그래도 눈물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정말 이상하지. 하지만 지금은 슬프지 않다. 만화를 보다가 갑자기 슬퍼져서 우는 정도이다. 그래,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니 생각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원인을 알 수 없는 세상, 원인을 알 수 없는 사람, 원인을 알 수 없는 나, 원인을 알 수 없는 핑핑. 그냥 그렇게 핑핑 돌아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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