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 것

시월의숲 2011. 9. 19. 19:53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졌다. 불과 어제까지만해도 늦더위의 뜨거움 때문에 머리가 어질어질 했는데 말이다. 사람들은 갑자기 떨어진 기온 탓인지 목소리가 변하고, 연신 코에 휴지를 갖다댄다. 나는 아직까지 괜찮지만, 감기 몸살과는 다른, 그보다도 더 커다랗고 암울한 기운이 어제까지만해도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약간의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이 주말내내 나를 떠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온갖 비극적인 상상과 음울한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어쩌면 극단적인 절망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아니다. 극단적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뭐랄까 아주 슬프고 슬픈 것. 알 수 없는 무기력과 자책, 미래를 상상하지 못하는,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린 자의 처참한 슬픔. 뭐 그런 것들을 나는 생각했었고, 그런 것들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찬바람이 불어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늘 직장동료의 문상을 다녀왔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 두 가지 다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주말 내내 나를 지배했던 알 수 없는 우울로부터 조금씩 빠져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대하는 아들의 얼굴은 담담했고, 같이 간 다른 동료들의 얼굴에 간간히 떠오르던 웃음(죽음을 앞에 두고도 우리는 진정 웃을 수 있다!)과 환하게 웃고 있는 영정사진 속의 얼굴이 나를 알 수 없는 우울의 나락으로부터 서서히 빠져나오게 한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역시 알 수 없는 그 감정은? 가슴 속 한 켠에서 어떤 말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고. 아니, 나는 그 말을 이렇게 바꿔야 할 것이다. 내가 나를 힘겹게 할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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