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시월의숲 2011. 9. 26. 23:40

여기저기 블로그를 들락거리다 누군가 올려놓은 무궁화 사진을 보았다. 그 사진을 보니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때 매년 그렸던 무궁화 그리기 대회가 생각났다. 지금은 보훈의 달 포스터나 무궁화 혹은 태극기 그리기 같은 것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매년 그런 행사를 했었다. 나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무궁화를 그릴 때마다 항상 교과서 맨 앞장에 그려진 무궁화 그림을 보고 따라 그렸었다. 실제 무궁화가 어떻게 생겼는지 살펴보지도 않고, 그냥 막연히 교과서에 그려진 무궁화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린 것이다. 누구도 실제로 무궁화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주지 않았고, 길가에 핀 무궁화를 보더라도 다가가 살피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렸다. 그런 내가 무궁화 그림을 그리다니. 그건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거의 모든 학생들이 똑같은 모양의 무궁화를 비숫한 붓질과 색깔로 마치 기성품을 찍어내듯 그려냈었다. 나는 지금 당시 교육의 문제점이나 경험의 중요성 뭐 그런 거창한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당시 내가 받은 충격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똑같은 무궁화들 속에서 나는 매우 희귀한 무궁화 그림 한 점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내가 실제로 지나치면서 본 그 무궁화와 같았다. 꽃잎이 비현실적으로 활짝 벌어지지도 않았고, 꽃만 덩그러니 있는 것도 아닌, 꽃과 줄기와 잎이 함께 어우러진 무궁화. 그 그림을 보았을 때의 신선한 충격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왜 내가 본대로 그리지 못했을까? 실제 무궁화는 내가 그린 무궁화와 많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왜 나는 그것이 무궁화의 진짜 모습이라고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교과서에 그려진 그림은 나를 무궁화는 으레 그래야한다고 무의식 중에 인식하게 했고 나는 아무런 저항없이 그것에 따른 것이다. 어느 선생님도 똑같은 무궁화 그림에 대해서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긴 무궁화 그리기 대회에서 중요했던 것은 무궁화를 '어떻게' 그리느냐가 아니라 무궁화를 '그린다는 것 그 자체'였을테니까. 그것을 통해서 주입시켜야할 어떤 관념 때문에 우리는 어쩌면 똑같아 질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시절이었다고 말하는 건 너무 성급한 결론일까? 그렇다. 지금도 우리는 너무 쉽게 편견에 빠지고 아무런 의심없이 고정관념에 휘둘린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끔 궁금해진다. 똑같은 무궁화 그림들 속에서 홀로 자신만의 아름다운 무궁화를 그린 그 아이는 누구였을까? 그의 삶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 비범함과 용기를 닮고 싶다. 편견에 물들지 않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자신만의 무궁화를 간직한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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