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슬픈 짐승

시월의숲 2011. 9. 30. 22:37

1.

퇴근 후 집에와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코피가 났다. 특유의 어지러움을 느끼며 잠시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내가 요즘 좀 무리를 했었나? 순간 나 자신이 무척이나 가엽게 느껴졌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일을 하며, 코피를 흘리고, 스트레스를 받고, 신경을 쓰는 것일까? 무엇을 위하여?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자에게 삶은 살아도 사는게 아니리라. 요즘들어 부쩍 수면장애와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들은 자식들이 있고, 남편 혹은 부인이 있으며, 어엿한 직장에 수입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 무엇이 그들의 신경을 갉아먹고 정신을 흩트려서 한없는 우울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것일까? 물론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닐 것이다. 모두들 조금씩은 저마다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은 나약하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무엇이 달라지는가? 나는 나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불쌍하고 가엾다. 들여다보면 온통 구멍이 숭숭 나있을 것만 같다. 나사가 하나쯤은 풀려 있을 것 같다. 자신이 아픈줄도 모른채 씩씩함을 가장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런 인간들의 세계 속에 나 역시 살고 있다. 인간들의 비극은 자신의 종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외면하려고 하는데서 비롯된다. 그래서 그렇게도 열심히, 하루하루를 수많은 것들과 부대끼며 전쟁처럼 사는 것이리라. 아, 그저 코피가 났을 뿐인데 이건 또 무슨 망상인지. 내 문제점은 그것이다. 쓸데없이 고민한다는 것.

 

 

2.

내일 모레가 조카의 돌이다. 김해에 살고 있는 동생이 대구에서 돌잔치를 한다고 해서 내려가봐야 한다. 동생은 나에게 많은 것을 바라고, 나 역시 대부분 그것을 들어주려고 하는 편이다. 하지만 가끔씩 그것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아니, 늘 부담스럽다. 엄마가 없이 자란 동생은 늘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동생에게 그것도 못해주냐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을 하고 아직 돌도 되지 않은 조카의 얼굴을 내게 들이민다. 나는 엄마없이 자란 것은 너뿐만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차마 하지 못한다. 동생 앞에만 서면 우유부단해지는 내가 때론 바보스럽다 생각되지만 어렵게 자란 동생에게 잘해주고 싶은 마음 때문에 무리한 부탁일지라도 거절하지 못하고 못내 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계속된다면 나뿐만이 아니라 동생에게도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나는 내 몫의 삶이 있고 동생에게는 동생의 삶이 있는 것이다. 동생이 무리하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내 삶에 개입한다면 서로 불행해질지도 모른다. 이제부터는 좀 단호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런 고민을 하는 내가 정말 싫지만 어쩔 수 없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관계가 가족이라는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일방적인 이해와 보이지 않는 짐을 강요한다. 폭력성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기도 한다. 물론 당사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지만.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차가운 손  (0) 2011.10.09
시월의 숲으로  (0) 2011.10.05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0) 2011.09.26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 것  (0) 2011.09.19
원인을 알 수 없는 핑핑  (0) 2011.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