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할아버지

시월의숲 2012. 2. 4. 14:29

그리 긴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닌데, 아주 많은 시간이 내게서 흘러가버린 것 같다.

 

내 안에서 나를 지탱하던 무언가가 툭, 하고 부러진 느낌, 가슴 한 켠이 휑하니 비워진 느낌, 시도 때도 없이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설명할 길 없는 감정의 덩어리 때문에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지난 설날 병원에서 본 할아버지의 모습이 끝내 마지막이 되었다는 사실, 내게 술을 사오라 심부름을 시키던 할아버지와 텔레비전을 볼 때를 제외하고 언제나 트롯트를 들으며 노래를 흥얼거리던 할아버지, 늘 같은 의자에 앉아계시던 할아버지와 무언가를 항상 적으시던 할아버지를 이젠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는 사실. 그 당연하고, 엄연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입원을 하셨을 때도, 수술을 해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수술을 하고 난 후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도 나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털고 일어나 집으로 당당히 걸어들어오실 줄만 알았다. 하지만 내 안일함을 비웃듯 할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내가 만약 눈물을 흘렸다면 그것은 누군가를 미워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의 눈물일 것이고, 내가 만약 가슴이 아팠다면 그것은 역시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내 어리석음에 대한 아픔일 것이다.

 

슬픔 속에 있을 때는 그 어떤 책의 가르침이나 감동의 말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생각나지 않고, 그래서 당연히 그 어떤 말도 표현할 수 없다. 그저 묵묵히 슬퍼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슬픔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우리는 훗날 그때의 죽음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어느 순간 기억해내고는 잠깐의 추억에 잠길 뿐이다. 죽음만큼이나 명징하고 단호한 그 사실이 나는 무섭다. 하지만 죽지 않는 이상 나는 어떻게든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리라.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남겨진 자들은 말을 만들어 낸다.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가려내는 일은 살아있는 자들의 몫이리라. 나는 그 모든 일들이 그저 부질없게 느껴진다. 죽음은 많은 것을 덮지만, 모든 것을 덮지는 못하는구나. 나를 가려주던 그늘이 하나 사라졌으니 나는 때로 맨몸으로 태양과 마주해야 할 것이다. 내 삶은 늘 그렇듯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생겨난 것만 같다. 그렇게 나는 또 살고,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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