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오늘

시월의숲 2012. 2. 14. 22:13

1.

요즘 건망증이 부쩍 심해졌다. 손에 연필을 들고 연필이 어디있냐고 찾으러 다니는 정도는 아니지만 자꾸 깜빡깜빡 하는 통에 나 자신에게 점차 자신이 없어진다. 여러가지 일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하나의 일을 정리하기도 전에 다른 일을 해야하기 때문일까? 며칠 전에는 결재판을 어디에 놓아둔지도 모른 채 한참이나 찾으러 다니다가 결국은 찾지 못했는데, 다음날 동료가 자신의 책상에 있었다며 나에게 가져다 주었다. 또 금방 받은 서류를 어디다 놓았는지 찾지 못해서 애를 먹고 있는데 다른 서류철에 떡하니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가. 문제는 내가 그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데 있다. 몇 차례 이런 일이 일어나자 나 자신에 대한 회의가 슬며시 고개를 든다. 내가 왜 이러나 하는.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꽤 꼼꼼하고 차분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덜렁대고 서두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게 또한 나라면 인정하고 보듬어 안아야겠지만 계속 그런 면이 나타난다면 나 자신이 분명 싫어질 것이다. 정신을 차리는 수밖에는 없다.

 

 

2.

어느새 입춘이 지났고, 정월대보름이 지났다. 달력의 작은 글씨로 적혀있는 절기는 왠지 비밀스런 우주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암호같다. 양력의 날짜는 계절의 움직임이나 달의 차고 지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는(그러니까 별 감흥이 없는) 그저 숫자에 불과해 보인다. 앞을 향해 한참을 달리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면 어느새 저만치 앞에서 짖궂은 웃음을 짓고 있는 계절에 깜짝 놀라곤 한다. 오늘은 일 때문에 한 시간 정도 걷게 되었는데, 제법 포근해진 날씨에 봄이 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추운 겨울만 있는 것이 아니었지! 순간 바보같은 깨달음이 들어 머쓱했다. 그러니까 이제 겨울은 봄에게 자리를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아직 며칠 전에 온 눈이 다 녹지도 않았건만, 이제 슬슬, 눈에 보이지 않게 조금씩 녹는 눈처럼 그렇게 봄은 오고 있었다. 일부러 큰 도로로 가지 않고 시장 골목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가본 재래시장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활기에 차 있었다. 어디선가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하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들이 모여서 윷놀이 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돼지머리, 소머리를 전시해놓은 국밥집들을 지나 생선가게, 문어, 과일, 떡집을 지나 옷가게, 이불가게, 쌀가게에 이르기까지 재래시장 특유의 생기넘치는 분위기가 내내 고여만 있던 내 감정에 미묘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나이는 많지만, 젊은 사람들 못지않게 시장 사람들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내게 전해졌기 때문이리라. 오래 앓았던 병이 낫는 느낌, 무언가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 들어 어느 순간 눈물이 날뻔도 했다. 시장 안의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아프고, 슬프고, 아름다웠다. 그건 예전에 나를 키워주었던, 하지만 지금은 사라져버린 할머니 때문만은 결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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