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그냥 그렇게

시월의숲 2012. 3. 1. 21:37

태양은 거기서 그저 그대로 빛나고 있을 뿐인데, 겨울의 태양과 봄, 그리고 여름과 가을의 태양은 내게 엄연히 다른 것으로 느껴진다. 겨울의 태양은 태양이 거기 그렇게 찬란히 빛나고 있음에도 느끼지 못한채 몸을 움츠릴 뿐이고, 여름의 태양은 너무나 뜨거워 그늘만을 찾아 돌아다닌다. 가을의 태양은 그것을 느낄 필요충분 조건을 모두 갖춘 완벽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쓸쓸한 기운을 떨칠 수가 없다. 하지만 봄의 태양은 온기란 무엇인지, 따스함이란 무엇인지 느끼게 해주는 가장 적당한 빛과 온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물을 고통스럽게 깨우기도 하지만 곧 그렇게 깨어난 후 미소짓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모처럼의 공휴일. 늦잠을 자는데 슬쩍 잠이 깨어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좀 더 잘까 생각했지만, 이내 잠이 들지 않아 일어났다. 석고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커튼을 걷자마자 눈부시게 쏟아져내리는 햇살! 순간 짧은 현기증과 함께 미세한 충격이 내게 남아있던 잠을 달아나게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셀렘의 감정이었고, 나는 그 감정의 정체가 당황스러워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삼월의 첫째 날에 어울리는 날씨라는 것이 있다면 딱 오늘같은 날씨여야만 하리라. 햇살은 모든 지붕위에 내려앉아 그것을 어루만지고,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은채 깊이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나를 감싸는 햇살을 느끼며 한동안 그렇게 거기 서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 영원이 될 수 있다면 아마 그러한 예기치 못한 순간의 짧지만 강렬한 감정의 체험 때문이 아닐까?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그런 순간은 훗날 그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양분이 될 것이다. 비록 오늘이 여느날과 똑같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그저그런 날이었다고 해도, 왠지 그 순간만큼은 그럴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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