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결혼하기 좋은 날

시월의숲 2012. 11. 18. 21:10

결혼하기 좋은 날이 있다면 바로 오늘 같은 날이 아닐까?

 

하긴 오늘 같은 날엔 무엇을 하더라도 다 좋겠지만. 약간 쌀쌀하긴 했지만 바람도 적당하고 무엇보다 햇살이 눈부셔서 결혼식장 가는 내내 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발령이 나는 바람에 전에 함께 일했던 직장의 동료들과는 연락을 거의 하지 않고 지냈는데, 며칠 전 그 중 한 명이 청첩장을 보내왔다. 아, 그래, 결혼을 하는구나. 나는 축하한다는 연락을 했고, 그녀는 고맙다는 말을 했다. 축하한다고 하긴 했지만 어쩐지 결혼식장에는 가기가 싫었다. 아니, 싫었다기 보다는 귀찮았다. 주말에도 일하러 나가는 경우가 많아서 이번 주는 모처럼 쉬는가 했는데, 결혼식에 가야하다니. 처음엔 그냥 다른 사람에게 부조만 부탁을 하고 식장에는 가지 말아야지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뭐 아무렴 어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가서 밥 한 끼 해결하고 오면 되는걸. 혼자 사는 이에게 밥 한 끼를 해결한다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인 것이다. 그래서 대충 차려입고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예식장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일요일은 쉬는 날이 아니라 다들 결혼식에 가는 날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얼른 부조를 하고, 신부에게 얼굴도장을 찍고, 예식을 좀 구경한 다음 식장에서 만난 옛 직장동료들과 밥을 먹으러 갔다. 뷔페는 평범했는데, 아침을 먹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먹지 못했다. 오랜만에 만난 동료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식장을 나와서 집까지 천천히 걸었다. 예식장에서 내가 사는 집까지는 걷기 딱 좋은 코스였다. 봄이면 벚꽃축제를 하는 길을 따라 낙엽 떨어진 벗나무 사이를 걸으니 절로 노래가 흘러나왔다. 걷다가 문화예술의 전당에 들러 상설 전시회를 구경했다. 여러 명이 합동 전시회 같은 것을 했는데 작가마다 개성이 각각이라 보는 재미가 있었다. 사진전도 구경했는데 생각보다는 평범했다. 지금 기억에 남는건 별과 시간에 관한 것을 형상화 해놓은 작품이었다. 그림인 줄 알았는데, 헝겊을 물감으로 칠해서 찢은 다음 캔버스에 붙인 것이었다. 어느 것 하나도 작가가 심혈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그 작품은 어느 것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종이컵에 녹차를 담아 내게 주었고, 나는 녹차를 음미하며 전시회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모두 결혼식장으로 갔는지 전시회장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이렇게 좋은 날, 사람들은 모두 무엇을 하며 사는 걸까? 결혼을 하기 위해? 결혼식장에 가기 위해? 아, 아니다, 시니컬해지지 말자. 오늘같은 날은 무엇을 하더라도 다 좋으니까. 심지어 정말 결혼을 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실제로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날리는 없겠지만. 오늘 같은 날 결혼 하는 사람들은 아마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조금 더 행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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