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자기만의 방

시월의숲 2012. 11. 21. 16:43

지금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학창시절 나는 지금의 나를 상상하지 못했다. 어떤 모습일까 막연히 상상해본 적은 있지만 이내 그것은 현실의 문제에 휩쓸려 더는 가지를 뻗지 못했다(이건 이상한 일이다. 현실이 어둡고 힘들수록 사람들은 미래를 더욱 집요하게 상상하지 않는가!).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무언가 빠진 듯한 삶을 상상한 것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내가 나만의 미래를 그려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때 하루하루를 사는데 지쳐 있었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불안과 두려움의 근원을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당시 내 모든 것을 지배했었고, 그래서 나는 미래를 상상하는 것조차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것 같다. 그저 이 시간이 흘러가기를, 흐르다보면 어느 순간 다른 곳에 와 있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은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온전히 나를 위해 살지 못했고, 온전한 나만의 행복을 느껴보지 못했다. 물론 소소히 느끼는 행복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 반짝하고 바스러지는 불꽃처럼 허무하고 아쉬운 것이었다. 그것은 금방 사라지고 잊혀졌으며 그래서 나를 더 괴롭게 했다. 때 나의 유일한 꿈은 나만의 작은 방을 가지는 것이었다. 무엇이 되겠다가 아니라 무엇이라도 좋으니 그저 나만의 작은 '공간'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 그것이 그렇게 터무니없이 크고 어려운 바람이었을까? 어쨌거나 당시에 그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었고, 나는 살기 위해 스스로 가족이라는 허울 좋은 울타리 안에 붙은 기생충이 되었다. 나는 살기 위해 밥을 하고, 빨래를 돌리고, 방과 화장실을 청소했다. 그래도 집안엔 퀴퀴한 냄새가 가시지 않았고 벽지는 곰팡이로 시커맸으며, 비가 샌 천장은 누렇게 떠서 울룩불룩하고 화장실의 타일은 날로 부식되어 갔다. 집은 마치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거대한 짐승같았다.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고(희망따위는 생각해본 적이 없고) 하루하루가 고통으로 가득찬 슬픈 짐승. 나는 그 짐승 곁에서 죽음의 숨결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어쩔 수 없는 삶이란 바로 그런 것이리라. 나는 스스로 집안에 기생하는 벌레가 되었고 기꺼이 가족들에게 내 피를 내어주었다. 가족들은 말할지 모른다. 그건 너무 심한 말이 아닌가. 네가 힘들었다는 걸 우리는 다 알고 있고, 그것에 대해 너에게 무척 미안하고 또 감사하고 있다고. 그런 말은 아무런 소용도 필요도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 그건 그들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그랬듯이.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어쩔 수 없는 삶' 안에 갇혀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니까. 그리고 어쩌면 이건 나만의 자학에 자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숨 쉴 수 있었던 건 이런 자학의 기록을 통해서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내가 내 삶을 견딜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일기장을 몰래 숨겨놓고 비밀스럽게 나만의 생각을 적기 시작했다. 내 일기장의 권수가 점차 늘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내 삶의 기록이자 그것을 통해서만 숨을 쉴 수 있는 통로 같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녔다. 나는 묵묵히 일기를 쓰면서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고통스러운 적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적도 있었다. 처음 직장을 가졌을 때 내가 좀 무덤덤했던 것은 미래에 대해 기대를 하지 않고 오로지 자학으로 삶을 견디는 습관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리라. 직장으로 인해 나는 공식적으로 집을 나왔고, 나만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물건들을 모조리 내다 버렸다. 그렇게 버린 것들 중에 내 일기장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집안 구석에 처박혀 있는, 아직 풀지 않은 박스 속에 들어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나는 행복한가? 나는 지금 내 삶에 만족하고 있는가? 만족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물음은 삶을 적극적으로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기를 바라고만 있었던 내게 그 물음은 김 빠진 콜라를 마시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때로 무언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어딘가 나사가 하나 풀린 것 같고, 그래서 그곳으로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것 같고(윤성희 소설의 주인공처럼),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고, 다른 사람들의 삶은 어떨까 궁금해지는 것은 도대체 왜일까. 나는 아직도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흘러가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는가? 시간은 흐르는데, 흘러서 지금 이곳까지 내가 떠내려 왔는데,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되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이미 오래전에 행복해 질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도 안이하게, 수동적으로 모든 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의지박약. 그래, 나는 상황에 나를 맞추려고만 했지 그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내가 나를 당시의 상황에 맞추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의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도 만만한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지금까지 온 것이 이젠 고착되어버린 내 나태함과 수동성의 근본원인이자 변명일 것이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모든 것이 두렵고 불안했으며,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조용히 흘러가기만 바랐다. 하지만 나약함으로 버티던 생활은 이제 끝낼 때가 된 것 같다(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나약함을 딛고 일어나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삶을 살아봐도 좋지 않을까? 내 마음 속 빠진 나사는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끼워야만 하는 것이다. 녹이 슨 곳은 기름을 칠하고, 빠진 부분은 채워 넣으면서. 그럴 수 있을까? 정말 내가 변할 수 있을까? 의심이 그림자처럼 나를 덮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이해할 수 없는 긍정에의 예감이 나를 사로잡는다. 비록 그것이 불안정하고 임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지금 내겐 '자기만의 방'이 있으니까. 한 때 내 유일하고도 절실한 소망이었던 그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