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당신의 출생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시월의숲 2013. 2. 18. 21:14

점심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 내게 며칠 전 내가 아버지와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나는 그때 울산에서 출발하여 안동에 막 도착한 길이었고,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나와 첫 번째 횡단보도를 건너 늦은 점심을 먹으러 식당을 찾아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별안간 '저하고 많이 안 닮았지요?'라고 말했다. 그게 평소 내가 아버지를 생각하면 드는 보편적인 생각이었는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마땅히 할 말은 없고 해서 그냥 내뱉은 말이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였는지 모른다. 아무튼 그때 나는 그에게 그렇게 물었고 그는 당연한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나는 한술 더 떠서 '저는 제 동생과도 그리 닮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렸을 땐 제가 정말 어딘가에서 주워온 아이가 아닐까 생각했답니다. 아버지도 저를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하셨고요. 물론 농담이었지만요.'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내가 그런 말을 한 이유를 나도 알 수 없었다. 단지 내가 아버지의 틀림없는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닮지 않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고 또 나조차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그런 말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아이들은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이를 닦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말 누군가에 의해 버려진 아이였다면, 그래서 내가 지금 알고 있는 모든 것들, 아버지와 동생, 할아버지와 고모, 늘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던 고향집과 그 속에서 설거지를 하고 국을 끓였던 나라는 존재가 모두 누군가의 버려짐에 의한 역사였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나의 출생이 어떤 사고, 혹은 말해지지 못할 어떤 사건의 불행하고도 모두가 쉬쉬하는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면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자기 앞의 생>의 모모처럼 '내 존재를 증명해 줄 유일한 증거는 나 자신 뿐'이라는 말을 하며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의 카밀라처럼 자신의 생모 혹은 생부를 찾아서, 할 수만 있다면 먼 이국땅까지 찾아갈 여력이 내게 있을까?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드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야말로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만 가능한 그런 이야기를 상상하며 그 속에 나를 던져보는 일에 무슨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그냥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나는 아찔함에 몸을 살며시 떨었고, 곧이어 드는 어떤 안도감에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서 있는 이 공간과 나와 관계된 모든 이들에게 이유 없는 고마움마저 들었다. 그런 생각도 든다. 이건 아직 내가 중학교 시절의 나를 충분히 아파하지 못한 탓이라고. 그때의 고통을 충분히 통과하지 못한 것이라고. 그러니까 아직 이 나이가 되도록 어른이 되지 못했다고. 아니다.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자. 그건 그냥 슬프고, 아프고, 절망적이며, 암울한 어떤 '상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까. 그런데 말이야, 어쩌면 우리 모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출생의 비밀을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원히 밝혀지지 않고, 밝힐 수 없는 그런 출생의 비밀 말이다.

 

나는 어두워진 창가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내력을 곰곰히 생각해 본다. 그들의 옷차림과 저마다 굳어져버린 표정과 걸음걸이, 눈빛 등으로. 하지만 그건 내 허약한 상상력에 막혀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도 나는 그들의 비밀을 언어로 풀어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 그렇다면 일단은 나부터 시작해야할까? 내가 내 출생의 비밀을 상상했듯이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