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시월의숲 2013. 4. 10. 19:48

친구에게 블로그를 한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때 친구 집에서 컴퓨터로 블로그에 댓글을 달고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이야기했고, 친구도 아무런 감흥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내가 블로그를 한다고 해서 그 친구가 관심을 보일 것 같지도 않았고, 관심을 보인다고 해도 별 상관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친구는 즉각 무슨 블로그를 하냐고 물었고, 나는 독후감과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이나 그 밖에 내가 나라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드러내보이는 게시물은 올리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러자 친구는 나중에 내 블로그에 한 번 들어와 보겠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어쩐지 그때부터 줄곳 그 말이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그가 내 블로그에 들어와서 내가 쓴 글을 본다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 것인가.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그것에 관해서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현실세계에서 나를 아는 누군가가 내가 익명으로 글을 올리고 있는 나만의 세상에 들어와 내 글을 본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순간 난감함이랄까, 당혹감 같은 것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내가 쓴 글이 현실의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 것인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상상하는 건 정말 내 능력 밖의 일이다. 하지만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하는가? 나는 왜 나를 아는 누군가가 내 블로그를 본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워하고 난감해하는가? 무엇 때문에? 일반인들의 눈으로 보기에 불온하고 발칙하며, 비도덕적이고, 사회통념에 어긋나는 내용이라도 있기 때문인가? 이곳이 실은 내 무의식의 발로(내가 의식하고 있건 아니건 간에)이기 때문에? 혹은 내가 쓴 글이 거짓과 허위로 가득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사실이고, 어느 정도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아주 단순한 사실, 그건 내가 쓴 일기를 누군가 훔쳐본다는 사실에서 오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어떤 감정을 들켜버렸다는 사실에서 오는 수치심과 당혹감, 그로인해 생기는 알 수 없는 기대감 같은 것. 나는 그것을 느끼고 상상하는 건지도 모른다. 호들갑을 떨긴 했지만, 실제로 그는 내 블로그에 들어와 보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다. 그렇게 한가하지도 않거니와 그만큼의 관심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때 한 말은 그냥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에 지나지 않았을 뿐. 하지만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그에 감응하고, 댓글을 남길 수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묘한 기대감은 모종의 흥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어쩌면 그런 기대감 때문에 나는 거의 방문하는 이 없는(나 자신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이 블로그를 놓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얼마간은 그렇다. 그런 것 같다.

 

 

*제목은 최영미의 산문집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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