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도로는 지금 공사중

시월의숲 2013. 7. 12. 20:05

매일 출퇴근 하던 길과는 다른 길로 다니고 있다. 벌써 몇 주 전부터 시에서 배관공사를 하느라 내가 다니던 길을 다 파헤쳐 놓았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도로에 칼로 그은듯한 선이 생기더니, 그것을 기준으로 굴착기가 포장된 도로를 파내기 시작했다. 출근할 때마다 굴착기가 땅을 파내는 소리와 먼지 때문에 걸어 다니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공사가 마무리되는가 싶더니 오늘 또 먼지를 풍기며 땅을 판다. 퇴근길에 보니 파놓은 땅으로 인부 서너 명이 들어가 삽으로 시커멓고 물기 많은 흙을 파내고 있었다. 아마도 하수도인 모양이었다. 새 배관으로 교체한 곳은 다시 흙을 부은 후 천을 깔아놓아서, 도로를 따라 마치 레드카펫처럼, 헝겊 카펫이 깔린 모양이 되었다. 나는 천 아래 지표면의 울퉁불퉁함을 느끼며 걸었다. 생각해보면 다른 길도 많은데 하필 왜 그 길로만 다니려고 했는지 모를 일이다. 길이 아예 막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길로 돌아간 적은 있으나, 그렇지 않은 이상 발걸음은 늘 내가 다니던 길로 나를 인도했다. 내장이 드러나듯 파헤쳐진 길, 물과 흙이 뒤범벅되어 질척한 길을 왜 걸으려고 했을까? 익숙함, 습관, 타성 뭐 그런 것 때문일까?

 

도로를 따라 길게 파헤쳐진 길을 보고 있자니, 며칠 전 팔 수술을 한 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수술하자마자 일어나 걸으며, 돌아다녀야 빨리 낫지, 라고 말했다. 관절이 없는 팔꿈치의 신경을 살리는 수술을 한 아버지는 지금껏 자신의 왼팔 때문에 겪어야 했던 일들을 읊조리듯 나에게 말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아버지의 팔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에게나 말 못할 사정은 있다는 것, 그것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은 결국 자신이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새삼 깨달았다. 내가 아버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아버지는 지금이라도 이렇게 수술을 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이냐며 나를 보고는 슬쩍 웃음 지었다. 나도 따라 웃으며 하얀 붕대로 휘감긴 아버지의 왼팔을 쳐다보았다. 붕대 아래로 피가 번져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피묻은 붕대를 한 번 쓰다듬으며 아버지에게 이제 그만 이야기하고 좀 쉬라고 말했다. 병원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나는 다시 돌아왔다. 아버지는 아직도 병원에 있다. 일주일을 더 있어야 한다고 교수는 표정없는 얼굴로 말했다.

 

아직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천으로 덮인 길을 걸어 집으로 온다. 하수도관을 새로 교체한 이 길은 흙으로 메꾼 울퉁불퉁한 도로 위의 천을 걷어내고 다시 예전처럼 매끈한 길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이 길을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갈 것이다. 아버지의 팔 또한, 피묻은 붕대를 벗어버리고 예전처럼 아프지 않던 팔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아버지를, 아버지의 팔을 아무 생각 없이 붙잡을 것이다. 그때 아버지가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