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

시월의숲 2013. 6. 15. 16:35

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영화 <트레인스포팅>의 도입부에 보면 이런 나레이션이 나온다. 항상 누군가가 무언가(좋은 집, 좋은 차 등등)를 선택하라고만 하는데, 자신은 왜 그런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선택하지 않는 삶을 선택하겠다(I chose not to choose life)." 이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 전체의 주제를 굉장히 강렬하고 선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이후로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했다. 내가 가진 의문도 주인공 마크(이완 맥그리거)와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은 항상 무언가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하라고만 하는가? 자신을 위한답시고 하는 그 말들이 정작 자신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오히려 무시무시한 폭력으로 다가와 자신을 짓누르고, 할퀴고, 물어뜯어, 피 흘리게 한다는 것을 그들은 정녕 모르는 것일까? 어느 때는 그들이 그것을 정말 모르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원래 다 그런 거야. 나도 그런 선택의 강요에 못 이겨 적당히 타협하고 굴종하면서 살아왔지. 살아보면 알겠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거야. 니들이라고 별수 있는 줄 알아? 다 그렇게 어른이 되는 거란다.' 그렇게 말하며 팔짱을 낀 채 쓴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다. 이건 내가 너무 삐딱하게만 보는 걸까? 하지만 그 정도로 그들이 말하는 선택이라는 건 내게 참을 수 없는 억압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영화 속 주인공이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그만 돌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러면 되겠구나! 하고.

 

지금껏 그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삶에서, 선택하지 않는 삶을 선택할 권리란 존재하지 않는게 아닌가, 하는. 어느 순간 우리는 반드시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때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겠다는 답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존재한다면 그건 우리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생각.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겠다는 대답은 선택을 유예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 유예된 선택, 유예된 삶.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선택. 현실에서 피터팬은 영원히 피터팬일 수 없다는 진실. 그것에서 오는 절망감. 왜 이런 절망감에 빠져드는지 알 수 없다. 살다 보면 반드시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 순간이 오리라는 사실을 이젠 알아버렸기 때문일까? 하지만 이건 일시적인 절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엔 분명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세상은 그런 사람들 때문에 다양해지고, 조금 아름다워지기까지 하니까. 견고하고 차가운 현실의 벽 앞에 오랫동안 서 있어서 조금 지친 것일 뿐. 그 벽을 깨부수지 못할 바에는 그 벽을 포기하면 될 일이다. 그 벽이 삶의 전부는 아니므로. 내가 원하는 삶의 벽 앞에 서면 될 일이다.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는 건 결국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왜 내가 세상이 만들어 놓은(누가 만들어 놓은 건지도 모르는) 것들에 휘둘려 내 삶을 바쳐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그런 것들에 깃털만큼의 흥미도 느끼지 않는데!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겠다. 물론 그 이후의 모든 책임은 내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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