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한 걸음 더 내딛는 것에 관해서(설국열차)

시월의숲 2013. 8. 6. 18:57

 

 

 

(스포일러 있습니다)

 

 

뭔가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보편적으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힘겹지만 본받을만한) 가치 있는 어떤 것. 한국적인 상황을 정교하게 뒤틀거나, 교묘하게 녹여내는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적인 것들, 그러니까 계급 투쟁의 문제, 개인적 혹은 사회적인 상황 속에 놓은 인간이 자신이 처한 틀을 벗어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 같은 것 말이다. 헤르만 헤세식으로 말하자면,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의 문제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좀 더 넓고 평범하게 말하자면, 인간 보편의 '삶'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배우 중에 누군가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한 것 같기도 하다). 확실히 꼬리칸 사람들과 앞쪽 칸 사람들 간의 대조는 인류 보편의 문제인 계급을 문제를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인 커티스는 자신이 처한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기꺼이 혁명의 우두머리가 된다. 우리는 그를 보면서 감정이입을 하고 투쟁의 실질적 목적인 독재자 윌포드를 악당이라고 쉽게 단정 짓는다. 겉으로 보기에 선과 악의 뚜렷한 구분 속에서 우리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가진 자의 횡포와 압제에 분노하고, 독재자의 타도를 외친다. 커티스가 꼬리칸에서부터 엔진칸으로 한 칸씩 전진할 때마다 우리는 짜릿한 흥분과 함께 앞으로 도래할 장밋빛 미래에 대한 기대로 한껏 부푼다. 그 와중에 죽어 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필수불가결한 희생으로 그려진다.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죽음조차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종 목적지인 엔진칸에 도착하여 윌포드를 만나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부터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지는 상태에 빠진다. 그 독재자가 하는 말, 꼬리칸의 사람들을 바퀴벌레로 만든 음식을 먹게 하고, 강제로 아이를 데려가고, 조금만 자신의 의견을 말할라치면 협박과 살인으로 입을 막아버리는 그 독재자, 기차를 만든 장본인인 그가 하는 말에 혁명의 전사인 커티스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만다. 새로운 빙하기라는 환경에서 기차 안 사람들 다수가 살아남으려면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 그는 자신이 기차를 설계했듯 사회를 설계하고 유지하려 한다. 기차의 총수인 메이슨의 말처럼, 자신의 자리를 알고,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커티스는 윌포드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한다. 꼬리칸의 성자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길리엄이 윌포드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아마도 가장 큰 충격이었으리라(물론 그 말은 윌포드 자신이 지어낸 말일 수도 있다). 나는 그 눈물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할 것인가? 그대로 주저앉아 윌포드의 뒤를 이어 기차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윌포드와 같은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약물중독자 혹은 정신이상자처럼 보이는 남궁민수의 말을 따라 죽음을 무릅쓰고 기차에서 탈출을 할 것인가? 기차 안에는 억압과 모순과 부조리가 있고, 기차 밖으로 나가는 것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는데? 어떤 선택도 만만하지 않지만, 커티스는 선택할 수밖에 없다(이는 우리네 삶을 대변한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어떤 선택이 혁명가 커티스, 우리 자신, 즉 인간에게 어울리는가? 다수의 이익을 먼저 생각했더라면 커티스는 윌포드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아이마저 기차를 가동하기 위한(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부품으로 이용할 뿐인 사회라면, 이 사회가 힘없고 죄 없는 자들의 부당한 무덤 위에 세워지고, 그들의 죽음에 의해 굴러왔던 것이라면 선택지는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커티스는 선택한다. 아이를 살리고 기차 밖의 또 다른 세상을 믿기로. 그 대가는 엄청나게 큰 것일지라도, 그는 그 한 걸음을 내딛는다. 비로소 그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틀과 세상이 만들어놓은 틀을 깨부순다. 알을 깨고 날아간다. 그렇듯 자기 파괴적인 결말이 무정부주의적인 허무함으로 빠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희망에 대한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커티스의 선택이 충분히 가치가 있음을 보여준다. 기차에서 태어나 자란 요나가 기차를 벗어나 맨 처음 본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틸다 스윈튼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다. 영웅적인 주인공도 물론 좋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기차의 총수 틸다 스윈튼의 연기가 좋았다. 가장 인상 깊고 돋보이는 캐릭터라서 배우 자신도 연기하는 동안 무척 즐기지 않았을까? 한국 배우들도 무리 없이 영화에 잘 녹아들어 간 것 같다. 전체적으로 영화의 캐스팅이 맘에 든다. 이 영화를 두고 지루하다는 평과 그렇지 않다는 평이 나뉘는 것 같던데, 나는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굉장히 몰입하면서 보았다. 아마도 지루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고편에서 보았던 액션에 대한 기대감이 컸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이 영화는 초반에 약간씩 맛을 보여주다가 후반부에 액션을 몰아치는 흔한 블록버스터의 액션 영화 공식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초반에 액션을 보여주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점차 액션이 줄어든다. 후반부는 거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들의 불만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드디어 대장을 만났는데 고작 한다는 게 대화라니! 하지만 이 영화의 핵심은 바로 그 대화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윌포드와 커티스가 대화하는 장면에서 밀도 높은 액션을 볼 때와는 다른, 강도 높은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모든 무력을 무화시킬만큼 커다랗고 정신적인 것이었다. 거기에 액션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온몸과 온마음에 힘이 빠지고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하지만 감독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간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를 특별하게 하고, 몇 번이고 다시 보게 한다. 자잘한 개연성의 의문에도 불구하고(특히 SF팬들은 실망이었을 것이다) 무척 멋진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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