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탐엣더팜

시월의숲 2014. 5. 31. 14:21

 

(스포일러 주의)

 

 

자비에 돌란이란 감독의 이름을 최근에서야 알았다. 칸 영화제에서 주목하는 젊은 감독으로 지금까지 총 다섯 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각본에다 주연까지 한 영화가 네 편이나 된다. 아직 스물 다섯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였고 그래서 천재로 칭송 받기도 하는 그를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자비에 돌란이란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무언가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이름만 듣고서 그런 느낌이 들 수 있는지 알 수 없고, 그래서 의아했지만, 그 느낌은 확실히 나에게 자비에 돌란이란 이름을 머릿속에 새겨넣게 만들었다. 어쩌면 이름 때문이 아닐지 모른다. 이름을 먼저 알았다 하더라도 후에 나는 그가 만든 <탐 엣 더 팜>이라는 영화의 예고편을 보았고, 거기서 느꼈던 묘한 매력이 감독의 이름을 더욱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비에 돌란이란 이름이 나를 끌어당긴 이유가 온전히 이름 자체에서 오는 어감 때문이었는지, 이름을 둘러싼 그의 이력과 영화의 예고편 때문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알 수 없지만, 그래서 더욱 특별해진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그의 영화를 보기 위해 개봉관을 찾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곳은 극장이 두 곳 밖에 없고, 당연히 그곳에서는 그의 영화를 상영하지 않았기에 대도시의 영화관을 찾아보았다. 대도시의 메이저 영화관들은 상영하는 영화가 거의 같았으므로, 그보다는 예술영화전용관을 찾아야 했다. 그러던 차에 내가 사는 곳에서도 예술영화전용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바로 그곳에서 자비에 돌란의 <탐 엣 더 팜>이 개봉한다는 사실을 알아 내었다. 나는 기쁜 마음에 혼자 박수를 쳤다. 절로 박수가 나왔다. 아주 놀랍고도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처럼 나는 개봉일과 시간을 달력에 표시해 두었다. 그날이 바로 어제였다. 어제 나는 처음으로 예술영화전용에 가서 자비에 돌란의 영화를 보았다. 나에게는 꽤 의미있는 날이었다. 그렇지 않을 이유가 없다.

 

 

영화관에는 내 예상대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인터넷 카페에 올려진 일주일치의 개봉작과 시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의 개봉 시간에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 영화를 상영하지 않으니 그럴만도 했다. 나는 상영 시간에 늦을까봐 부랴부랴 달려갔는데, 가서도 40분은 더 기다려야 했다. 기술적인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는데, 그것은 내가 오늘의 첫 손님이었기 때문에, 손님이 오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문제처럼 보였다. 나는 느긋하게 기다리면서 극장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약간은 지저분하고 오래된 분위기를 풍길 것이란 예상은 빗나갔다. 극장은 깔끔했고, 정리가 비교적 잘 되어 있었으며, 음료와 차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조금 더웠지만 에어컨을 틀어달라고 하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상영관에 들어가니 한 명의 손님이 먼저 와 있었다. 나는 적당한 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는 주인공이 파란색 잉크로 냅킨처럼 보이는 종이에다 글을 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드넓은 들판의 풍경과 그를 가로지르는 자동차와 불어로 부르는 여가수의 노래가 겹쳐진다. 그는 지금 자동차를 타고 죽은 연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고 있다. 그가 도착한 농장에서 그는 연인의 어머니와 형을 만난다. 어머니는 아들의 친구에게 호감을 가지고 대하지만, 형은 자신의 동생이 남자인 그와 연인사이였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협박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어머니에게 결코 진실을 알리지 말라는 이유에서였다. 연인의 형이 행사하는 압도적인 힘에 굴복한 그는 그곳을 벗어나고자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자발적으로 그곳에 남는다. 왜? 무엇 때문에? 그는 말한다. 그 애와 냄새가 똑같아. 그 애의 목소리와 똑같아. 그는 연인을 대체할 다른 사람이 필요했던 것일까? 하지만 연인은 자신의 일부와도 같다고 했지 않은가? 자신의 일부와도 같은 사람이 죽었는데 어찌 그를 대체할 다른 사람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를 대체할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의 그림자를 쫓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는 아직 연인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자신의 일부와도 같았던 사람이 죽고 난 후 남겨진 이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남겨진 이들이 각자의 사랑 때문에 해야하는 거짓말에 관한 이야기였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주어야 하는 폭력에 관한 이야기였다. 차마 진실을 발설하지 못하고, 그 진실이 밝혀질까 두려워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폭력을 감당해내는 이야기였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주인공이 형이 시키는대로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사라'라는 친구를 불러서 그녀에게도 거짓 애인 행세를 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집안의 뒤틀린 분위기를 감지한 사라가 그에게 같이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할 때, 그가 하는 말은 가히 놀라웠다. 또한 노란 불빛으로 환한 창고에서 그와 형이 탱고를 추던 장면과 옥수수밭에서 쫓고 쫓기는 장면은 기이하고도 불가해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수확하고 난 후의 옥수수대가 그렇게 날카롭고 위협적으로 느껴질 줄은 몰랐다. 그곳에 들어가면 나오지 못할 것처럼 옥수수대로 빽빽한 공간은 이 영화의 전반적인 느낌을 말해주는 것 같다.

 

 

다시, 왜 그는 폭력적인 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가.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감독은 그에게 실제를 깨달으라고 종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러가지 소품들에 적힌 메시지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감독 역시 그가 죽은 이의 그림자 속에 살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에 폭로되는 형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그는 비로소 눈을 뜬다. 죽은 이를 대체할 사람은 현실엔 없음을. 자신의 일부와도 같다고 생각했던 연인이 실제로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사람이었을지도 모름을. 정보는 불충분하고 우리는 몇 개의 장면, 몇 마디의 대화에서 상황을 유추해 볼 수밖에 없다. 거짓말의 향연 속에서 서서히 그는 실제를 깨닫는다. 그를 감싸고 있던 그림자가 점차 걷혀진다.

 

뒤틀리고 기이한 매력으로 가득한 영화다. 고통스럽지만 아름답다. 그 중심에 감독이자 주인공인 자비에 돌란이 있다. 그러니까 이건 자비에 돌란의, 자비에 돌란에 의한, 자비에 돌란을 위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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