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스토커

시월의숲 2013. 3. 1. 22:15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본다는 건 내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는 어떤 세계를 보는 것과 같다. 그의 영화 스타일과 그 속에 담긴 내용, 메시지, 세계를 논할 능력은 내게 없지만, 그 속에 빠져들게 하는 어떤 매력이 있음은 쉽게 부인할 수 없다. 그가 그려보이는 세계는 우리가 평소 익히 알고 지내던 친숙하고 착한 세계가 아니다. 그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알고는 있지만 짐작할 수 없었던 세계, 감히 입 밖으로 말해지기가 꺼려지는 세계, 윤리나 도덕 따위는 잠시 접어두어야 하는 세계, 광기와 폭력과 섹스가 난무하거나 교묘히 얽혀있는 그런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영화 <스토커>역시 내겐 그런 세계 속으로 나를 밀어넣는 일이었다. 하지만 <올드보이>나 <복수는 나의 것>, <박쥐>에서처럼 피 투성이의 공간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온화하지만 좀 더 광기어리고 아름다우며 매혹적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평온한 해방감을 느꼈던가?

 

<스토커>는 일종의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열 여덟 살의 소녀가 있는지도 몰랐던 삼촌을 만남으로써 서서히 광기와 폭력의 세계로 빠져드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정상인이 보기에는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그녀의 성장기는 보는 이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으나, 그것이 바로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해주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금지된 것은 파멸에의 예감 뿐만 아니라 매혹과 신비를 또한 제 몸에 지니고 있어 보통의 사람들은 감히 그것에 손을 댈 엄두조차 내지 못하나,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이에게 그것은 자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자신의 또다른 모습을 보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이들에게 금기는 위험하면 할수록 그것에 쉽게 빠져들 수밖에 없는 무엇이 되는 것이리라. 영화 속에서 인디아는 말한다. 자신이 언제 찍혔는지도 모르게 찍힌 사진을 본 적이 있느냐고. 그건 타인을 보듯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나 자신이라고. 대략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암튼 그것이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몰랐던 나 자신을 발견하는 일, 말이다.

 

다들 각본에 구멍이 많다고 하던데, 보고나니 과연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살인사건과 그것을 조사하는 경찰과의 관계는 좀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감독 특유의 영상미는 단연 돋보인다. 삼촌과 인디아의 피아노신과 알, 거미 등에 부여된 상징성은 좀 뻔한 면도 있었으나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배우들은 모두 딱 맞게 캐스팅 된 것 같고, 연기 또한 좋았다. 삼촌 역할을 맡은 매튜 굿은 <싱글맨>에서 처음 본 후 내 기억에 남은 배우였는데, 이 영화에서도 역시 그 커다랗고 맑은 눈이 꽤 인상적이었다. 니콜 키드먼은 말할 것도 없고 인디아 스토커 역을 맡은 미아 바시코브스카 역시 멋졌다. 그리고 음악! 영화 전편을 타고 흐르는 음악이 이 영화의 미스테리하고 불안한 매력을 한층 배가시켰고, 특히 엔딩에 나온 에밀리 웰스의 노래는 정말 신의 한 수라고 느껴질 만큼 좋았다. 영화가 끝났다는 직원의 안내멘트와 영화가 끝나자마자 불이켜지고, 일어서서 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노래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어 좀 안타까웠지만. 한동안 그 노래만 계속 듣게 될 것 같다. 나중에 영화 OST가 나오면 바로 사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이런 영화를 보고 아름답다 말하면 좀 이상할까? 때론 갑갑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던 미장센들은 숨막히게 아름다운 어떤 것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회화같은 영화였다고 말하면 또 좀 이상할까? 어쨌거나 불온하고 위험한 것들은 그 안에 어떤 광기어린 매혹을 품고 있다. 반복적인 패턴의 음악이나 무늬가 그러하듯이. 물론 그것은 배우들의 외모나, 감독의 연출력 같은 것과 함께 어우러졌을 때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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