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무덤

시월의숲 2013. 9. 9. 19:43

*

가을이 오기 때문에 책이 안 읽히는 것인지 책이 읽기 싫어서 가을 탓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은 제목의 아름다움과 인상적인 서두에 비해 뒤로 갈수록 몰입도가 떨어진다. 비교적 짧은 분량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고자 하는 마음이 점차 옅어지는 것을 느낀다. 이유를 대라면 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핑계에 지나지 않음을 잘 안다. 어쨌거나 요즘은 잡생각이 많아지고, 집중력이 떨어진다. 그게 가을이라는 계절 탓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소설 자체가 재미없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더디더라도 끝까지 읽을 것이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다.

 

 

*

어제는 벌초를 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두 형제와 함께. 돌아가신 할아버지 때문에 떠맡게 된 벌초도 두 건이나 있다. 대가 끊긴 집안의 조상이라는 것은 알지만, 누구의 무덤인지도 모른 채 벌초를 하는 건, 어쩐지 초상집에 가서 실컷 울고 난 후 누가 돌아가셨느냐고 물어보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를 제외한 아버지의 두 형제 모두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무덤을 벌초하는 일 따위는 하지 말자고 했으나, 아버지는 완고하게, 자신이 살아 있을 때 만큼은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같이 하지 못하겠다면 자신 혼자서라도 하겠다고 덧붙였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너무나도 불필요한 일 같다고 생각했다. 아마 아버지의 두 형제도 아버지의 고집을 꺾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껏 그런 문화 속에서 살아왔으니.

 

다섯 개나 되는 무덤에 난 풀을 깎았다. 세 개의 무덤은 비교적 쉬웠으나 내 할머니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의 무덤은 거의 밀림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거기 무덤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온몸으로 풀을 헤치며 들어가 묵묵히 예취기를 돌리고 낫을 들어 풀을 베었다. 정오가 가까워져 오자 태양 볕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작은아버지는 땀을 비 오듯 흘렸고, 작은어머니는 그늘에 앉아 남편의 형제들이 벌초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예취기로 베어진 풀들을 갈고리로 모아 무덤 바깥으로 버리는 일을 했다. 아카시아와 두릅나무, 이름을 알 수 없는 갖가지 풀들이 빽빽이 들어선 공간에 서서히 무덤의 형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볼록하게 솟아있었을 봉분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차 평평해져 가고 있었다. 이미 죽은 사람의 무덤에서조차 시간의 무참함을 느끼게 하는 건 봉분을 만드는 특유의 문화 때문일 것이다. 쌓였던 봉분은 언젠가 그 자취도 희미하게 사라질 것이다. 그게 두려웠던 것일까? 죽어서조차 잊히는 게 두려워서 옛날 왕들은 그렇게 높게 무덤을 쌓아 올렸던 것일까?

 

내가 알 수 있는 건,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무덤 또한 그러하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누가 여기 묻혔는지조차 알 수 없어진다는 것. 그건 슬플 일도, 쓸쓸할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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