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부모는 아이의 노예다

시월의숲 2013. 9. 23. 21:29

부모는 아이의 노예다.

 

나는 저 문장을, 내가 가끔 들러 몰래 훔쳐보곤 하는 어느 소설가의 블로그에서 발견했다. 그렇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혹은 '읽었다'가 아니라 '발견했다'. 저 문장은, 내가 평소 생각하고 있었지만, 마땅히 표현하지 못했던 문장이었다. 그래서 그 문장을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의 블로그에서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상스런 고요'와 '알 수 없는 격렬'이 뒤섞인 공감을 하고야 말았다. 문장으로 표현되지 못한 채 머릿속에 무형의 덩어리로 존재했던 어떤 생각이, 타인의 머릿속에서 나와 언어로 표현된 것을 내가 보았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발견'이 아니라 '재발견'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소설가는 알타이의 후손들, 아마도 몽골(이었던 것 같다) 지역의 어느 가정을 방문하게 되었고, 거기서 아이들과 그 부모들을 보게 되었다고 했다. 한국의 아이들과 외모는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눈빛과 표정에서 그는 낯선 익숙함을 느꼈으리라. 하지만 몽골의 가정이었기 때문에 그가 저 문장을 생각해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부모는 아이의 노예'라는 문장으로 걸어 들어가기 위해서 일부러 몽골의 가정을 방문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인종과 국경, 이념을 넘어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해당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내가 느꼈던 '이상스런 고요와 알 수 없는 격렬이 뒤섞인 공감'은 추석 연휴동안 내가 체험했던 것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나는 미혼이고 아이도 없으니 직접적으로 저 문장을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가깝게, 간접적인 체험만으로도 나는 저 문장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이해할 수 있었다. 추석 때 나는 내 동생의 두 아이들과 함께 보냈다. 첫째 아이는 네 살 생일이 얼마남지 않은 딸, 둘째 아이는 두 살이 조금 덜 된 아들이다. 첫째는 이제 막 말문이 터진 사람처럼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쉴 새 없이 쏟아내고, 둘째는 방을 아무런 스스럼 없이 기어다니며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망가뜨리거나, 물어 뜯거나, 집어 던진다. 추석 연휴동안 나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을 돌보는 보모가 되었다. 하기 싫은 일은 아니었으나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돌봤다. 그들과 놀아주고, 밖에 나갈 때는 도로에 차가 지나다니는지 보아주고, 혹 길을 잃을까 신경쓰고, 걷기 힘들다고 하면 안아주고, 밥도 먹여주었다. 부모라면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을 내가 대신 한 것이다. 내가 그들을 돌봐주는 동안 동생 부부는 휴식을 취하며, 그동안 아이들 보느라 힘들었는데 조금이나마 돌봐 주어서 고맙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나는 아주 잠시 동안 아이들을 보는 것이지만, 동생 내외는 매일 아이들을 돌봐야 한다. 아이가 생기고 한동안은 거의 자신의 생활이라는 것이 없이, 아이한테만 매달려야 하는 것이다. 가장 정력적으로 활동할 시기에 그들은 아이들로 인해 싫든 좋든 그들의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꺼이 그것을 원한다. 아이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기를 마다치 않는다. 피로와 수면부족을 아무렇지 않게 감수한다.

 

그들은 말한다. 결혼해서 일찍 아이를 낳아서 키워야 나중에 늙어서 편하지.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이상한 생각이 든다. 늙어서 편하기 위해 아이를 낳는가? 아이를 낳아 돌보는 것이 자신이 늙은 후에 보살핌을 받기 위해서인가? 그럴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서 기꺼이 부모는 아이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부모는 아이의 노예다. 그 아이도 훗날 노예가 되리라. 일반적인 노예와 부모라는 노예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자발성이다. 부모는 분명 아이의 노예지만, 그것은 스스로 선택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자발적인 노예로의 길이 쉽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혹 우발적으로 생긴 아이라면, 자발적 노예로의 길은 더욱 힘들지 모른다. 내가 알지 못하는 지점도 바로 거기다. 또한, 지금의 내가 알 수 없는 건, 자발적인 노예가 되게 만드는 아이의 힘이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다. 그건 부모가 되지 못한다면, 자식을 낳아보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리라. 부모가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자식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것은 내가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에 있다.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