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나의 언어

시월의숲 2013. 9. 3. 22:01

*

날씨의 미묘한 변화에 따라 내 몸도 미묘하게 변하는 것 같다. 오늘 아침에는 반팔옷이 조금 서늘하다 느껴질 정도였다. 며칠 전부터 몸이 조금씩 무거워지고 머리도 무겁다. 낙엽이 지듯 내 몸도 보이지 않는 옷을 벗는 걸까. 나에게만 중력이 조금 강해진 느낌이 든다. 혹은 내려간 기온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태풍의 영향인지, 비는 오지 않았지만, 하루종일 흐리고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어딘가 이국의 하늘처럼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옆자리의 동료가 갑자기 휴가가고 싶다!고 마치 구호처럼 외쳤다. 어디로 가고 싶냐고 물었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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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에 국화꽃이 두 종류 들어왔다. 점심을 먹고 국화를 들고나가 분갈이를 했다. 하지만 마땅한 화분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 하나는 노랗고, 하나는 옅은 보랏빛이었다. 보랏빛 국화는 활짝 피었고, 노란 국화는 아직 꽃잎을 꼭 다물고 있었다. 활짝 피면 보기 좋겠지만, 활짝 피지 못하는 것도 있으리라. 활짝 피지 못하고 그대로 말라버린 꽃을 보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나는 내가 바로 그런 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자주 사로잡힌다. 시간이 지나 어쩔 수 없이 굳어가긴 하지만 활짝 핀 채로 굳어버리지 못하고 입을 다문채 죽어가고 있는건 아닌지. 중학생 때 이후로 나는 크지 못했고, 그대로 지금까지 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닌지.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면 산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나는 급격히 땅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 들고, 손이 떨릴 정도의 두려움에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다. 내가 나를 무의식적으로 옭아매고 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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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이 된 건지도 모른다. 아무런 생각없이, 생각하고 있는 척 쓰는 말들이. 인생이 어떻고, 삶이란 무엇이고, 비밀이 어떻고, 슬픔과 두려움, 죽음이란 무엇이고... 체념의 말들, 어설픈 깨달음의 말들, 관조하는 투의 말들,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의 말투, 다짐을 위한 다짐, 비겁한 자의 변명, 이해할 것 같다고 말하는 자의 참담함을 알지 못하는... 이 모든 상상력 부족의 말에 질려 버렸다. 내 언어는 그렇게 빈약하고 황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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