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단상

시월의숲 2013. 9. 16. 21:15

김기덕 감독의 <뫼비우스>가 개봉을 했으나, 내가 사는 곳에서는 볼 수 없다. 단 두 개 있는 영화관 모두 상영하지 않는다. 제한상영가가 풀려서 볼 수 있겠거니 했는데, 이건 무슨 경우인지. 왕가위 감독의 <일대종사>도 그랬다. 감독의 명성 혹은 영화의 작품성과 영화상영관과는 무관한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사는 이곳에서는. <피에타>도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을 받지 않았다면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가 아무리 대중문화이고 자본의 논리를 따른다 하더라도 이건 좀 심한 것 같다. 하긴, 영화의 다양성이 결국 돈벌이로 귀결되지 않는다면, 팝콘 무비를 몇 차례 더 상영할지언정 돈이 되지 않는 영화는 상영하지 않겠지. 그러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우선이지 취향이나 다양성이 우선시 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열렬한 영화애호가도 아니고 김기덕이나 왕가위의 충실한 팬도 아니다. 다만 선택의 가능성에 대해서 좀 더 관대해졌으면 좋겠다는, 돈이 아닌 것에 좀 더 여유로워져도 좋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불만의 표현이랄까(내가 너무 순진한걸까?). 아니, 어쩌면 이건 돈의 문제라기보다는 지역(문화적으로 낙후된)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분명 어딘가에서는 <일대종사>도 <뫼비우스>도 상영하고 있을 테니까(물론 결국엔 돈의 문제로 귀결되지만).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다들 대도시에 살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뫼비우스>라고? 김기덕 감독의? 내가 언제부터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이렇게 보고 싶어 한건지 모르겠다. 아마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보고 난 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이전의 영화들도 때때로 보긴 했으나, 인간들사이의 안전한 거리는 철저히 무시한채 거침없이 파고드는 날 것의 느낌 때문에 무척이나 보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박찬욱이나 김지운의 영화와는 다른 잔혹함과 불쾌감이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는 있다. 내가 잔혹함과 불쾌함에 대해서 그들을 서로 비교할 깜냥은 없지만, 다른 느낌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다. 그리고 잔혹함과 불쾌감의 강도로만 봤을 때 김기덕의 영화가 단연 출중하다. 개인적으로는 장 주네의 소설 <도둑일기>를 읽었을 때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고, 혐오하는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김기덕의 영화와는 달리 <도둑일기>는 펄펄 살아 움직이는 핏빛의 낭자함은 없다. 그걸 원시적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암튼 화면을 바라보기 힘들게 만드는 장면, 상황, 느낌 같은 것이 김기덕의 영화에는 많든 적든 시종일관 있었다. 그나마 제일 보기 편했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조차도. 개인적으로는 초기 작품들보다 최근의 작품들에 마음이 더 간다. 감정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보다 완곡하게, 상징적이고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필두로 해서 <활>, <비몽>, <피에타> 같은 작품들. 특히 <피에타>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안타깝게도 <빈집>을 보고 싶었지만, 아직 보지 못했다. 이번에 개봉한 <뫼비우스>는 초기 작품 스타일로 회귀한 영화라고 하던데, 과연 어떨지 궁금하다. 볼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지만. 이런 곳에서는 김기덕 감독의 팬이 아니더라도 팬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예 상영조차 하지 않으니 더욱 그리워할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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