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요리하는 인간

시월의숲 2013. 9. 2. 00:30

어제는 마트에 가서 장을 본 후 토마토 스파게티를 해먹었다. 인터넷으로 레시피를 검색해 봤는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해물을 넣으면 좋겠지만 그냥 베이컨과 양파만 넣었다. 다음 번에 할 때는 재료를 좀 더 다양하게 넣어서 만들어 볼 생각이다. 처음 해본 스파게티는 예상외로 맛이 있었다. 하긴 토마토페이스트만 넣으면 웬만해서는 맛이 나기 때문에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다만 1인분이라고 하는 스파게티면의 양이 생각보다는 좀 적다는데 놀랐다(내가 먹는 양이 늘었나?). 새로운 요리를 해서 먹을 때마다 내가 조금씩 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스스로 요리를 한다는 건 아마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조금씩 성장한다는 걸 의미하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먹어야 살고,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요리를 할 줄 알아야 하니까. 일상의 엄숙함이랄까, 삶의 지난함 같은 걸 살짝 맛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요리를 못하는 남자의 삶이란 어떤 면에서 반쪽짜리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요즘 들어서는 요리에 대한 남녀의 구분이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우리의 아버지 세대만 해도 요리란 오로지 여성들만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으니 말이다. 고작 스파게티 하나 해봤다고 굉장한 걸 깨달은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사실 이건 혼자 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요리를 해야하는 자의 변명이 아닌가? 라고 누군가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부인이 있다고, 밥 해주는 아줌마가 있다고, 나 스스로 내가 먹을 음식 하나 못한다는 건 뭐랄까, 좀 이기적인 일이 아닐까? 요리를 한다는 건, 필요에 의해서 하는 것 이상으로 더 근원적인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먹는 인간이기 이전에 요리하는 인간인 것이다.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덤  (0) 2013.09.09
나의 언어  (0) 2013.09.03
녹색 낙엽과 투명한 바람  (0) 2013.08.26
휴가라면 휴가  (0) 2013.08.17
나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0) 2013.08.09